[기고/강정인]대학사회 멍들게 하는 ‘난개발’ 영어강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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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1년 4월 16일 03시 00분


강정인 서강대 정치외교학과 교수
강정인 서강대 정치외교학과 교수
최근 KAIST 대학생들의 잇단 자살을 계기로 학생들을 심리적으로 괴롭혀 온 징벌적 등록금 부과는 물론이고 과중한 영어강의 수강이 문제로 부각되고 있다. 전자가 KAIST에 국한된 특수한 현상이라면, 후자는 KAIST를 넘어 대학 교육 일반에 영향을 미치고 있는 심각한 사안이다. 영어가 국제화 세계화의 필수적인 요건으로 널리 받아들여지면서 무분별하게 시행되는 영어강의가 초래하는 문제들은 여태껏 주목을 받지 못해왔다.

영어강의는 점차 국제화되어 가는 환경 속에서 영어 구사능력을 필요로 하는 사회적 요구에 부응하기 위해서나 외국에서 온 교환학생 및 유학생들의 교육을 위해서도 그 필요성이 인정되고 있다. 하지만 영어강의가 필수로 부각된 이유는, 이런 실제적인 필요성을 넘어 한국 대학의 국제화 또는 세계적 수준의 대학 교육 달성이라는 화두가 영어를 절대적 평가 기준으로 삼는 사회적 풍조에 편승하여 무비판적으로 확산되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여기에는 대학 평가에서 영어강의 비율을 대학의 국제화 지표로 강조하고 선전하는 일부 언론사와 대학에 대한 국고 지원을 조건으로 외국인 교수 채용을 강조하는 정부의 주무부처도 가세하고 있다. 그 결과 KAIST처럼 전격적으로 모든 강의를 영어로 하진 않지만, 명문을 ‘자처’하거나 ‘지향’하는 수도권의 많은 대학들은 학생들에게 영어강의 이수를 필수로 요구하고 있다. 대체로 졸업 필수요건으로 전공과목 몇 학점 이상을 영어강의로 수강할 것을 요구하는 것이다.

필자 역시 영어강의의 ‘장기적인’ 필요성이나 장점을 굳이 부인하지 않는 편이고, 우리 사회도 커다란 반발이 없는 것으로 보아 이를 수긍하는 듯하다. 그러나 우리 사회의 많은 문제가 그렇듯이 이를 추진하고 실천하는 방식은 심각한 문제를 야기하고 있다. 특히 우리 대학들이 신중하고도 점진적인 접근을 통해 영어강의에 따르는 부작용이나 폐해를 시정하는 조치를 병행하기보다는 영어강의를 졸속으로 추진해 왔기 때문이다. 영어강의를 효과적으로 추진하기 위한 교수와 학생에 대한 지원 프로그램이 제대로 갖추어져 있지 않은 상태에서 일종의 ‘난개발’ 형식으로 진행하고 있는 것이다. 이에 따라 적지 않은 영어강의는 학문적으로 엉성한 수준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나아가 영어강의에 대한 무분별한 몰입은 우리 학문의 전반적인 경향마저 왜곡시키고 있다. 인문사회과학에서는 가뜩이나 학문의 서구 의존성, 특히 미국 의존성이 문제가 되고 있는데 영어강의에 대한 몰입은 이런 의존성을 더욱 심화시키고 있다. 여기에는 대학들이 영어강의에 대한 즉각적인 수요를 충족시키기 위해 영미권 출신 박사를 과거보다 더 편중해서 채용하고 있다는 점 또한 한 요인이 되고 있다. 이런 경향은 교수 채용과 관련하여 우스꽝스러우면서도 서글픈 촌극마저 빚어내고 있다. 프랑스에서 학위를 딴 박사가 최종면접을 치르면서 채용 후 영어강의를 요구하는 바람에 고민 끝에 스스로 물러선다거나, 독일이나 러시아에서 학위를 받은 박사가 채용 과정에서 강의 평가의 일환으로 영어강의를 하라는 요구에 독일어 강의로 응하거나 스스로 포기하는 사태가 왕왕 벌어지는 것이다.

한국 대학이 국내 박사를 외면하고 서구에서 교육받은 해외 박사를 우대 채용함으로써 국내 박사의 양성과 채용을 기피해 온 관행은 우리 학문의 주체성 및 정체성과 관련해 오랫동안 지적돼 온 고질적인 병폐이다. 우리 학문의 발전을 위해 해외의 선진적인 학문을 수용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점을 인정한다 하더라도 그 수입원이 다원화되지 못하고 주로 영미 지역으로 편중되고 있다는 사실은 이런 병폐를 더욱 악화시키고 있다. 개탄할 노릇이다.

강정인 서강대 정치외교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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