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날 그 시각, 시내에서 볼일을 보다 대지진을 만났어요. 죽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는 순간 휴대전화가 울렸어요. ‘엄마 괜찮아?’ 고등학생 아들에게서 온 전화였습니다. 최근 몇 년 동안 처음으로 아들에게서 온 전화예요. 아들은 몇 해 전부터 무슨 일인지 가족과 말을 하지 않았지요. 대지진 이후 우리 가족은 서로를 염려하고 대화도 늘었어요. 피해자들껜 미안한 말이지만, 대지진이 가져다준 유일한 좋은 점이 있다면 ‘가족’을 되찾았다는 점입니다.” 지난달 말 일본의 어느 라디오 프로그램이 소개한 중년 여성의 편지 내용이다.
아오모리대 3학년 와다 다이스케 씨는 대지진 이튿날 친구들과 함께 고향인 이와테 현으로 달려갔다. 하루 종일 피난소를 소독하고 지원물자를 운반하면서 구슬땀을 흘린다. 하쿠오대 4학년 메구로 미나미 씨(여)와 친구 5명은 취직활동을 잠시 접고 도치기 현에 있는 피난소에서 자원봉사 활동을 한다. 원전을 피해 후쿠시마에서 피난 온 초등학생들의 ‘임시 선생님’이 돼 하루 4시간씩 공부를 가르친다. 아키타고 2학년 시바타 가린 군은 수업이 끝나면 친구 30여 명과 함께 거리를 돌며 성금을 모은다. “피해민들을 생각하면 도저히 그냥 있을 수가 없었어요.”
미야기 현 미나미산리쿠 마을의 초등학교 6학년 와타나베 준 군은 피난소에 지원물자가 도착하면 어른들 틈에 끼어 짐 나르는 일을 돕는다. 가족을 잃고 말문을 닫은 어린아이들과 함께 놀아주고 말동무가 돼주기 위해 피난소를 찾는 중고교생도 적지 않다. 센다이 시의 간병복지사인 히라야마 마나미 씨(25)는 지진해일(쓰나미)로 숨진 조부모의 시신이 발견된 날에도, 약혼식을 치른 다음날에도 피난소에서 노인 환자 수발에 여념이 없었다.
상당수 자치단체가 행정기능을 상실하고 ‘매뉴얼’에 얽매여 우왕좌왕 손놓고 있을 때 이재민에게 따뜻한 밥을 지어주고 잠자리를 보살핀 것은 자원봉사자들이었다. 자원봉사를 하겠다는 고교생과 대학생이 워낙 많아 ‘대기자 명부’에 이름을 올려야 하는 피난소가 한둘이 아니다.
1990년대 이후 ‘잃어버린 20년’ 동안 일본의 젊은이에겐 희망이 안 보인다는 말이 많았다. 힘든 일은 포기하기 일쑤였고 도전정신은 찾아볼 수 없었다. 해외유학생은 갈수록 줄어들었다. 더 큰 세상, 낯선 환경에서 꿈을 펼쳐보겠다는 젊은이들이 줄어들자 글로벌 시대 일본의 미래를 걱정하는 목소리가 커졌다. 얽매이고 책임지는 게 싫다며 정규직보다 프리터(아르바이트)를 선호하는 젊은이도 적지 않다. 사회는 물론이고 가족과도 단절한 히키코모리(은둔형 외톨이)가 300만 명에 이른다는 통계도 있다. 가족도 싫고 사회도 싫고 국가도 싫다는 극단적 개인주의가 넘쳤다. 대학 교정에선 혼자 밥 먹는 학생이 한둘이 아니고, 그런 모습을 보이기 싫어 화장실 변기에 앉아 점심을 먹는 풍경까지 낳았다.
3·11 동일본 대지진으로 땅덩어리만 흔들린 게 아니라 젊은이들의 가슴속 극단적 개인주의도 심하게 요동치고 있다. 천리 밖 서일본에서, 바다 건너 외국에서 아무 조건 없이 내미는 도움의 손길을 매일 접하면서 ‘혼자’가 아님을 절감한다. 일찍이 일본에서 가족의 소중함, 사회와의 연대, 국가와 국제사회의 존재감이 이처럼 크게 다가온 적은 없었다. 한국의 4·19세대, 6·3세대, 386세대처럼 사회적 대사건은 새로운 ‘세대’를 낳기 마련이다. 일본의 3·11세대는 나만의 세계에서 벗어나 사회공동체에 눈뜨는 세대가 되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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