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에서/이진구]‘전수학교’의 추억

  • 동아일보
  • 입력 2011년 4월 20일 03시 00분


이진구 사회부 차장
이진구 사회부 차장
20여 년 전 처음 고등학교에 들어갔을 때 사람들은 이름에 ‘고등학교’ 명칭이 없다고 우리 학교를 ‘전수학교’라고 불렀다. 동기 중에는 연합고사에 떨어져 온 친구들도 있었다. 시작은 분명 그랬다.

첫 놀라움은 옆 반 급훈을 보면서였다. ‘전원 합격.’

다른 한 반은 성적순으로 자리를 배정했다. 1등은 창가 쪽 맨 앞자리, 꼴찌는 복도 쪽 맨 뒤였다. 자리는 한 달마다 모의고사 성적에 따라 바뀌었다. 시험 결과가 나오면 전교 약 200등까지 점수와 이름 등수를 명기해 교무실 옆에 방을 붙여 게시했다. 등수를 확인하려는 친구들은 방 앞에 모였지만 나머지 500여 명이 어떤 심정일지는 아무도 신경을 쓰지 않았다. 남학생들은 시험에서 틀린 개수대로 소위 ‘아귀창’을 맞기도 했다. 여학생들 치마 아래 종아리에서 퍼런 두 줄을 보는 것은 흔한 풍경이었다.

매주 월요일 아침 0교시에는 쪽지 시험을 봤다. 이 시험은 내신에 반영됐기 때문에 일요일이라고 쉴 수는 없었다. 월요조회 때는 우리 학교와 당시 명문고였던 강남 8학군 학교의 모의고사 성적 비교가 있었다. ‘우리 학교 상위 5%와 강남 ㄱ고(경기고) 5%를 비교한 결과 우리가 ○○점 차로 우수했다’는 내용이었다. 5% 이하의 학생들은 학교의 관심 밖이었다.

3학년이 되자 국영수 수업에 우열반이 생겼다. 문과 남학생 170여 명 중 우반은 50여 명. 며칠이 지나자 기자를 포함해 우반에서 수업 받던 10여 명을 선생님이 따로 불렀다. 선생님은 “너희 담임선생님이 성적 계산을 잘못했다”며 모두 열반으로 돌려보냈다. 창피함과 자괴감에 ‘죽고 싶다’는 생각을 넘어 누군가를 ‘죽이고 싶다’는 생각이 든 것은 그때가 처음이었다. 학교는 오후 10시경 끝났지만 대부분은 인근 사설 독서실로 자리만 옮겼다. 일부 선생님은 우리가 도착했는지 독서실로 확인 전화도 했다.

유쾌하지 않은 옛 기억을 반추하는 것은 최근 KAIST 사태를 보며 ‘경쟁의 이유’에 대한 물음이 생겼기 때문이다. 과도한 입시 및 경쟁 교육이 좋을 리 없다. 학교가 꿈과 희망으로 가득 찼으면 좋겠다. 하지만 지금 다시 고등학교를 선택하라면 아주 솔직히 우리 학교를 선택할 것 같다. 그렇게 몸부림친 학교 때문에 스스로는 제 앞가림도 변변히 못했던 학생들이 어떻게 달라졌는지 눈으로 봤기 때문이다.

그 학교가 지금의 대원외국어고등학교다.

서남표 KAIST 총장의 학교 정책이 옳은지 그른지 구성원이 아닌 기자는 판단하기 어렵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인간적인 경쟁은 존재하지 않으며, 구성원이 좋아하는 개혁도 없다는 점이다. 연구자는 좋아하는 연구에만 매진할 수 있지만 페이지 수에 한계가 있는 ‘네이처’지는 우수 논문 중에서 게재 순위를 정할 것이다.

한 고등학교의 몸부림은 그 학교와 고작 수백 명 학생의 미래를 바꾸지만 한 대학의 몸부림은 국가와 사회의 미래를 바꾼다. 이 고통은 엘리트라 불리는 사람들에게는 피해서는 안 되는 숙명이다. 비록 개인적으로는 많이 아프겠지만 그 고통이 클수록 세상이 지금보다 나아지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회는 자기 자식에게만 써도 모자랄 어느 부모의 돈을 세금으로 걷어 그들의 학비를 지원하는 것을 인정한다. 이것이 다른 학생들과 달리 그들에게 보다 과도한 학업과 경쟁을 요구하는 이유인 것 같다.

이진구 사회부 차장 sys1201@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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