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과 내일/정성희]게임 잔혹사

  • 동아일보
  • 입력 2011년 4월 23일 03시 00분


정성희 논설위원
정성희 논설위원
‘잘 키운 아들 하나 열 딸 안 부럽다.’ 요즘 똘똘한 여자아이들에게 밀리는 남자아이들의 세태를 반영한 신조어다. 옛날 가족계획 구호의 패러디여서 남자아이를 둔 부모들은 쓴웃음을 지을 수밖에 없다. 딸만 둔 부모는 늙어서 비행기 타고 해외여행 다니고, 아들만 둔 부모는 이 아들 집, 저 아들 집 전전하다가 길거리에서 죽는다는 말도 있다. ‘딸 둘에 아들 하나면 금메달, 딸 둘이면 은메달, 아들 둘이면 목매달’은 흔해빠진 우스개지만 아들만 키운 사람은 평균수명이 짧다는 통계가 있는 걸 보면 단순한 조크만은 아닌 것 같다.

집집마다 부모와 아들의 전쟁

키우는 과정이 힘들어도 나중에 보상과 보람을 찾을 수 있다면 기쁜 일이다. ‘유엔 미래보고서’에 따르면 여성의 구매력이 남성보다 월등하다. 가구 결정권의 94%, 휴가지의 92%, 주택의 91%, 자동차의 68%를 여성이 쥐고 있다. 디지털시대에 풍부한 감성, 종합적 판단능력, 네트워크 구축 및 소통능력에서 여성은 남성에 비해 경쟁력이 있다. 고시합격자의 여풍(女風)은 이젠 뉴스거리도 아니다. 국내 여학생의 대학진학률은 2년 연속 남학생을 웃돌았다.

아들 못 낳는 게 칠거지악(七去之惡)이던 시절이 불과 한 세기 전이었는데 어쩌다 아들이 ‘2등 국민’ 비슷하게 돼버렸을까. 얼마 전 아들 가진 엄마 몇 명과 얘기를 나누다 공통점을 발견했다. “게임만 없어져도 아들을 키울 수 있겠다”는 호소였다. 거의 모든 가정이 책 한 권으로도 모자랄 ‘게임 잔혹사’를 갖고 있다. 컴퓨터 본체를 들고 출근했다는 엄마, 유치원생 아들의 엄지 지문이 게임 하느라 사라졌다는 얘기, 게임에 빠진 아들을 목 졸라 죽일 뻔했다는 유명 여성 인사의 고백….

행정안전부 조사에 따르면 9∼19세 청소년의 인터넷 중독률은 12.8%(87만 명)다. 인터넷 중독은 게임에서 시작된다. 일단 게임에 빠져들면 학업과 수면 등 정상 생활이 거의 불가능하고 집안은 게임을 말리는 부모와 컴퓨터 앞을 떠나지 않으려는 아들의 전쟁터로 변한다. 게임에 빠져드는 것은 주로 남자아이다. 지난해 11월 중학생이 게임 중독을 꾸짖는 어머니를 살해한 뒤 자살했다. 올해 3월에는 게임 때문에 부모와 갈등을 겪던 학생이 고교 입학식 날 투신자살했다.

나도 젊은 시절 페미니즘 세례를 받았지만 게임에 빠지는 아들을 보면 ‘여자는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지는 것’이라는 시몬 드 보부아르의 명제를 부인할 수밖에 없다. 어릴 때부터 남자아이들에게 주어진 모든 장난감은 총칼로 변질되고 누가 가르치지도 않았는데 모든 놀이는 전쟁놀이가 돼버린다. 이게 남성호르몬인 테스토스테론 때문이란다. 그런데 인터넷 게임은 공격성, 경쟁심, 즉시만족을 관장하는 테스토스테론에 딱 맞도록 설계돼 있다. 아이들이 의지력만으로 게임에 저항하기 힘들다는 말이다.

셧다운제라도 제대로 해야

온라인게임 셧다운제가 스마트폰 모바일게임에 대해서는 2년 유예하는 조건으로 국회 법제사법위원회를 통과해 본회의 통과를 앞두고 있다. 전체 게임도 아니고 자정부터 오전 6시까지 심야시간만 한시적으로 게임 제공이 금지되는 것에 불과한데도 업계가 그토록 반발하다니 이기심이 지나치다. 밤늦은 시간에 청소년을 상대로 그동안 떼돈을 벌었다는 고백이나 다름없다. 게임업계는 게임 중독은 개인과 가정이 자율적으로 해결해야 할 문제라고 강조하는데 그런 논리라면 술 담배도 마음대로 팔게 하고 청소년더러 극도의 인내심을 발휘해 자제하라는 게 맞다.

누군가 대한민국의 미래를 묻는다면 밤 10시 이후 PC방을 보여주고 싶다. 나라 장래를 위해서도 남자아이들을 게임의 수렁에서 건져내야 한다. “셧다운제야말로 이명박 정부의 최대 치적이 될 것”이라는 한 엄마의 말을 대신 전해주고 싶다.

정성희 논설위원 shchun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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