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세청입니다. 세금을 환급해 줄 테니 계좌번호를 알려주세요.” “○○은행입니다. 고객님 계좌에서 100만 원이 인출됐습니다.” “선생님 아들이 교통사고를 당해 입원했습니다. 급히 돈이 필요해요.” 느닷없이 이런 전화를 받고 놀라지 않을 사람이 드물다. 지난주엔 현직 검사를 사칭해 “해외송금 사건에 연루됐으니 당신 계좌에 들어있는 돈이 검은돈인지 아닌지 확인해야 한다”고 속여 4명에게서 총 5585만 원을 입금받아 인출한 사건이 경찰에 적발됐다. 공인회계사 등 세상 물정에 밝은 사람들조차 낚시에 걸려드는 판이다.
우체국이나 은행 검찰 경찰을 사칭해 금융계좌, 신용카드, 주민등록번호 등 신상정보를 알아내 돈을 가로채는 보이스피싱이 기승을 부리고 있다. 우리 국민 10명 중 7명이 보이스피싱 전화를 받은 적이 있다는 통계도 있다. 경찰과 방송통신위원회는 보이스피싱이 등장하기 시작한 5년 전쯤부터 지금까지 2만5000여 명이 총 2600억 원의 피해를 본 것으로 추산하고 있다. 가족관계를 미리 알아내 ‘표적 피싱’을 하는 지능적인 사례까지 있다. 특히 약자인 노인들의 피해 사례가 많다.
이번에 한국인을 노린 보이스피싱 조직 23명을 붙잡은 것은 한중(韓中) 수사당국의 공조 덕분이다. 중국동포가 중심이 된 이 조직은 금융기관과 경찰을 사칭해 한국인들에게 전화를 걸어 신용카드가 도용됐다고 속인 뒤 자신들의 계좌로 입금을 유도하는 수법을 썼다. 이 조직은 100여 명으로부터 수십억 원을 가로챈 혐의를 받고 있다.
보이스피싱 조직들은 대부분 중국을 비롯한 해외에 근거지를 두고 있는 데다 점점 지능화되고 있어 국제공조 수사가 없이는 사실상 추적이 어렵다. 더욱이 범죄인 인도조약을 맺지 않은 나라와는 수사 공조 자체가 거의 불가능하다. 이번에는 대검찰청의 국제자금추적팀(IMIT)이 자체적으로 수집한 피해 사례와 수사 정보, 추적 결과를 중국 공안에 넘겨줌으로써 검거가 가능했다.
대만에서는 보이스피싱으로 의심되는 전화를 받은 경우 통화 도중에 버튼을 누르면 경찰이 실시간 감청할 수 있는 시스템이 가동되고 있다. 보이스피싱의 만연으로 금융기관이나 수사기관의 민원 관련 전화조차 받기 꺼리는 사회 분위기가 조성되고 있다. 신용사회의 기반을 흔드는 악질 범죄를 소탕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