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에서/이철희]카터, 꼭 ‘성가신 불청객’인지…

  • 동아일보
  • 입력 2011년 5월 2일 03시 00분


이철희 정치부 차장
이철희 정치부 차장
“56세로 백악관을 떠나야 했던 나는 너무 젊은 나이에 전직 대통령이 되고 말았다. 앞으로 내 수명이 적어도 25년은 더 남아 있는데 이 기간에 무엇을 해야 할지 결정해야 했다.”

지미 카터 전 미국 대통령은 1981년 퇴임 직후의 심정을 이렇게 회고한 적이 있다. ‘실패한 대통령’이라는 혹평을 들으며 쓸쓸히 물러나야 했던 터여서 고민이 더욱 컸을 것이다. 그는 이듬해 카터센터를 세워 서로 반목하는 세계 지도자들을 중재하는 ‘국제분쟁 해결사’로 나섰다. 올해로 어느덧 30년째다. 그런 노력을 인정받아 ‘대통령을 거치지 말고 바로 전직 대통령이 됐으면 좋았을 사람’이라는 평을 듣게 됐다.

카터센터의 모델은 그의 재임 시절 가장 큰 업적으로 꼽히는 ‘캠프 데이비드 합의’였다. 카터는 1978년 이집트의 안와르 사다트 대통령과 이스라엘의 메나헴 베긴 총리를 외부와 격리된 캠프 데이비드 별장으로 불러들여 30년 동안 갈등하던 두 나라의 화해를 이끌어냈다. 두 나라 정상을, 아니 자신까지 13일 동안이나 ‘인질’로 가둬놓고 양측을 설득해 이룩한 개인 외교의 성과였다.

이런 자신감을 바탕으로 카터는 이듬해 6월 한국 방문을 앞두고 불쑥 참모들에게 기발한 구상을 내놓았다. 방한 중에 자신과 박정희 대통령, 김일성 주석이 비무장지대(DMZ)에서 만나는 3자 회동을 추진하겠다는 것이었다. 캠프 데이비드 모델을 한반도에도 적용할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었다.

보좌진은 경악을 금치 못했다. 남북한 모두가 거절할 ‘괴상망측한 도박’이었기 때문이다. 이를 전해들은 윌리엄 글라이스틴 주한 미국대사는 “너무 놀라 의자에서 굴러 떨어질 뻔했다”고 말할 정도였다. 결국 참모진의 설득으로 아이디어를 접었지만 15년 뒤 카터는 이를 다시 되살려냈다.

북핵 위기가 정점을 치닫던 1994년 6월 카터는 북한을 방문해 김일성으로부터 남북 정상회담 약속을 끌어냈다. 그리고 17년의 세월이 지나 며칠 전 평양을 다녀온 카터는 ‘조건 없는 남북 정상회담’ 메시지를 들고 왔다. ‘집요한 이상주의자’ 카터의 면모를 엿보게 하는 대목이다.

카터가 1994년 평양에서 CNN 생방송을 통해 핵시설 동결 등 김일성과의 회담 내용을 공개하던 그 시간, 빌 클린턴 대통령은 백악관에서 대북 제재 추진을 최종 승인하고 대규모 병력 증파안을 보고받고 있었다. 미국은 ‘오시라크 옵션’, 즉 이스라엘이 이라크의 핵시설을 폭격했던 것과 같은 북폭(北爆)을 검토하고 있었다. 백악관 회의장에선 “(카터 회견이) 새로울 게 없다”는 반응이 주류였다. 심지어 “매국 행위나 다름없다”는 비난도 나왔다.

하지만 클린턴 정부는 카터의 회견 내용을 가급적 유리한 쪽으로 해석해 공식화하는 쪽을 선택했다. 요구 조건을 한 단계 높여 공을 북한에 다시 넘긴 이 전략은 주효했다. 당시 미국과 북한은 전쟁이라는 막다른 골목으로 치닫는 상황에서 빠져나갈 출구도 필요하다고 느끼던 상황이었고 카터가 그 퇴로를 연 것이었다.

이번 카터의 방북 이후 한국 정부 내에선 “북한 대변인이냐”는 비아냥거림이 나올 뿐 그의 명성과 영향력을 활용하려는 지혜는 보이지 않는다. 어차피 카터는 당사자가 아닌 제3자다. 그를 성가신 불청객으로 여기지 않고 선의의 중개인 몫을 하도록 만드는 것은 결국 당사자의 선택이다. 어쨌든 카터는 윗니를 드러내는 특유의 환한 미소를 띤 ‘평화 중재자’로 국제적 평판을 얻은 인물 아닌가.

이철희 정치부 차장 klimt@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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