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강국 헌법재판소장은 지난달 29일 오후 대전 KAIST에서 ‘헌법재판의 오늘과 내일’이라는 주제로 강연을 마친 뒤 대학생의 질문에 답하다 불쑥 현행 헌재 재판관 지명방식에 대한 얘기를 꺼냈다. 국가적 중대사를 결정하는 헌재 재판부를 구성하면서 선출된 권력(대통령 또는 국회)이 아닌, 대통령이 임명한 대법원장이 재판관 3명을 지명하도록 돼 있는 건 문제가 있다는 취지였다. 이 소장은 한발 더 나아가 “개헌이 추진된다면 이 부분도 검토돼야 할 것”이라는 말까지 덧붙였다.
이 소장의 강연 내용이 알려진 직후 대법원은 공식 논평을 자제했지만 불편한 기색이 역력했다. 법원행정처의 한 간부는 사견임을 전제로 “헌재 재판관 지명 방식은 1987년 개헌 당시 헌법 개정권자인 국민의 결단이 반영된 것”이라며 완곡하게 이 소장을 비판했다. 올해 2월 이공현 전 재판관의 후임을 지명하면서 재판부 구성 다양화라는 헌재의 필요에 맞춰 기존 재판관보다 사법시험 기수가 세 단계나 낮은 이정미 재판관을 지명했던 일을 거론하며 ‘불과 석 달 전에 헌재 입장을 배려해 40대 여성 법관을 지명했는데 뒤통수를 맞았다’는 반응도 나왔다. 법원 고위 관계자는 “원래 재판관 구성의 다양화는 대통령, 국회 지명 몫에서 해소해야 할 문제지만 이용훈 대법원장이 여성 법관을 보내자고 결심했던 것인데…”라고 말했다.
대법원과 헌재가 이처럼 ‘티격태격’하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지난해 정치권에서 개헌 논의가 일자 대법원은 은근히 ‘대법원의 헌재 흡수 통합’ 필요성을 제기해 왔다. 법률에 대한 위헌 심사권은 헌재가 갖고 있고, 법률의 적용과 해석의 최종 권한은 대법원이 갖고 있는 사법부의 이중구조를 해소해야 한다는 취지였다. 그러자 헌재는 ‘독립적인 헌법재판기관의 존속은 세계적인 추세’라는 점을 강조하는 등 두 기관은 치열한 물밑 기 싸움을 벌여왔다. 급기야 대법관 출신인 김황식 국무총리가 대법원과 헌재의 역할 조정의 필요성을 거론한 직후 이 소장과 헌재 재판관들은 김 총리 초청 만찬에 불참한 일도 벌어졌다.
하지만 대법원과 헌재의 이 같은 자존심 싸움을 두고 법조계 내부에서도 우려 섞인 시각이 많다. 정치권의 개헌 논의가 사실상 물 건너간 데다 개헌의 필요성에 대한 국민적 공감대도 형성되지 않은 현 상황에서 두 사법기관이 개헌 문제를 놓고 왈가왈부하는 것 자체가 부적절하다는 것이다. 한 변호사는 “대법원과 헌재가 권한 다툼 와중에서 개헌까지 거론하는 모습은 국민에게 부정적인 인상만 줄 것”이라고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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