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과 내일/정연욱]박근혜와 손학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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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1년 5월 3일 03시 00분


정연욱 논설위원
정연욱 논설위원
2003년부터 한나라당을 강타한 ‘차떼기’ 대선자금 수사의 후폭풍은 해가 바뀌어도 가시지 않았다. 2004년 2월 소장파인 원희룡 남경필 권영세 의원 등이 최병렬 대표 퇴진 카드를 꺼내들었다. “4월 총선 승리를 위해선 당의 간판이 바뀌어야 한다”며 최 대표 용퇴를 압박했다. 소장파 일부가 최 대표와 가까웠다는 점에서 ‘친위(親衛) 쿠데타’라는 관측이 나돌았다. 최 대표 체제에 불만을 느낀 일부 중진들까지 가세하자 최 대표는 더 버티기 힘들었다.

문제는 당의 새 간판이 될 대표감을 찾는 일이었다. 물밑에서 여러 대안이 모색됐지만 박근혜 의원과 손학규 경기도지사가 유력 후보로 압축됐다고 한다. 당내에서 비주류였지만 개혁성과 참신함이 두 사람의 강점이었다. 두 사람이 당 대표를 뽑는 전당대회에 출마해야 한다는 압박이 전방위로 가해졌다. 당 대표 출마는 두 사람의 정치 인생을 건 결단인 만큼 고민도 깊어졌다.

손 지사는 측근 회의를 소집했다. 젊은 그룹은 당 대표 출마의 승부수를 던져야 할 때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당 대표를 맡아 노무현 대통령 탄핵 역풍에 맞서 당을 살려낸다면 차기 대권을 향한 유리한 고지를 선점할 수 있다는 이유를 내세웠다. 이에 대해 중장년 그룹은 “도지사 임기가 절반이 남았는데 중도에 포기하면 역풍이 더 불지 않겠느냐”라고 반대했다. 결국 손 지사는 당 대표 출마를 접었다.

박 의원 진영도 장고에 들어갔다. 당시 당내 기반이 탄탄하지 않은 상황에서 전당대회 승리도 낙관하기 어려웠다. 설령 당 대표가 되더라도 거센 탄핵 역풍에 국회의원 총선을 제대로 치러낼 수 있을지 의문이었다. 자칫 탄핵정국의 ‘희생양’이 될 수도 있었다. 하지만 박 전 대표는 당 대표직에 승부를 걸었다. 그는 ‘천막당사’ 리더십을 발휘해 당을 위기에서 구해냈다. 지금의 박근혜를 있게 한 정치적 자산이 됐음은 물론이다.

결국 두 사람의 정면승부는 미뤄졌다. 손 지사는 2007년 대선후보 경선을 앞두고 한나라당을 탈당했고, 우여곡절 끝에 제1야당인 민주당의 대표직에 올랐다. 그는 지난달 사지(死地)나 다름없는 경기 성남 분당을(乙) 보궐선거에 출마하는 결단을 했고, 접전 끝에 승리를 거머쥐었다. ‘한나라당 출신’이라는 멍에를 벗어던지며 야권의 유력 주자로 본격적인 대선 행보에 들어갔다.

‘손학규발’ 폭탄에 맞은 한나라당에선 2004년 상황이 재연되고 있다. 어제 국회에서 열린 한나라당 의원 연찬회에선 친이(親李) 주류 실세의 2선 퇴진과 박 전 대표의 구원 등판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쏟아졌다. 한 의원은 박 전 대표를 의식한 듯 “천막당사 정신으로 다시 승부하자”고 외쳤다. 1년도 안 남은 내년 총선의 암울한 전망에 겁먹은 의원들에게서 “내 탓이오”라는 자성의 목소리는 찾아보기 어려웠다.

대통령 특사로 유럽을 방문 중인 박 전 대표도 귀국하면 당의 진로를 놓고 계속 묵묵부답할 수는 없을 것이다. 당장 당의 전면에 나서는 것은 부담스럽겠지만 “당의 위기를 나 몰라라 한다”는 지적을 그냥 흘려보낼 수도 없는 상황이다.

야권 내에서 누구보다 한나라당의 생리를 잘 알고 있을 손 대표는 박 전 대표의 귀국 후 대응을 예의주시하며 다음 행보를 준비할 것이다. 위기와 기회는 동전의 양면이다. 성패는 항상 변화와 쇄신, 결단의 리더십에서 갈렸다. 여야의 유력한 대선주자인 두 사람이 그동안 걸어온 길이 그랬다. 본격적인 대선 정국의 막이 올랐다.

정연욱 논설위원 jyw11@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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