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가 소년기를 보낸 지방 도시에서 은행은 에어컨이 있는 유일한 건물이었다. 중학생 시절 걸어서 등하교하는 도중에 은행 지점이 하나 있었는데 무더운 여름날이면 잠깐 그 지점에 들러 땀을 식히는 것이 조그만 즐거움이었다. 중학생의 눈에 그곳은 에어컨만 있는 게 아니라 내부시설 모두가 초호화판이었다. 당시로서는 흔치 않은 수세식 화장실까지 있어서 거기서 용변 본 경험이 친구들 사이에 자랑거리가 되기도 했다.
은행 건물이 호화로운 이유
은행이 대리석으로 치장한 고급건물을 가지고 있는 이유를 기자가 이해하게 된 것은 그로부터 20여 년이 지난 후였다. 그것은 기업의 채용담당자가 명문대 출신을 선호하는 이유와 비슷하다. 그 졸업생이 좋은 대학에서 좋은 교육을 받았기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또한 ‘명문대에 입학해 무사히 졸업할 만큼 똑똑하고 성실하다’는 신호(signal)를 중시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자산운용회사나 로펌이 멋진 원목가구와 그림으로 사무실을 꾸미며, 그곳 간부들이 최고급 승용차를 타는 것도 “야, 이 회사는 정말 성공한 회사로구나” 하는 신호를 보내기 위해서다. 마찬가지로 은행 건물이 화려한 것은 ‘이런 시설투자를 할 만큼 자금력이 든든하며, 당신 돈을 떼먹고 야반도주하는 일은 절대 없을 것’이라는 강력한 신호를 보내기 위해서라는 것. 이른바 ‘신호 이론’이다.
그렇지 않은 때도 있었다. 미국의 서부영화에 나오는 허술한 소도시 은행은 툭하면 강도에게 털렸고, 자기자본이 모자라거나 사기를 당해 수시로 파산했으며, 그때마다 은행가들은 자살하거나 야반도주했다. 1929년 대공황 시기에는 미국에서만 9000여 개 은행이 도산해 예금자들의 돈이 허공에 사라졌다. 이런 시련을 이겨내면서 은행은 자기자본을 강화해 신뢰를 쌓는 한편 대리석과 원목으로 스스로를 치장하기 시작했다. 기실 은행업의 역사는 처절한 신뢰 확보의 역사였다.
요즘 저축은행이 신뢰 문제로 수난을 겪고 있다. 금융감독원이 제일저축은행 검사에 착수했다는 보도가 그저께 나가자 즉시 예금자들이 몰려와 돈을 찾기 시작한 것. 영업정지된 부산저축은행의 예금자들이 돈을 못 찾고 울부짖는 모습이 연일 보도된 탓일 게다. 저축은행의 신뢰가 무너지고 있는 것이다.
사실 부산저축은행은 금융업체라 할 수 없을 만큼 ‘막가파식 투자’를 했고 대주주 불법대출, 분식회계, 영업정지 전날 밤 편법인출을 감행하는 등 비리백화점 같았다. 여기다 전국 104개 저축은행 중 7곳의 저축은행이 영업정지 상태다. 신뢰가 무너질 만하다.
하지만 제일저축은행 사건은 은행이 부실한 것이 아니라 임직원이 돈을 받고 대출해줬다가 기소된, 그야말로 개인비리였다. 막연한 심리적 불안에 기인한 뱅크런(bank run·돈을 인출하기 위해 앞 다퉈 은행으로 달려오는 현상)이다. 자라 보고 놀란 가슴 솥뚜껑 보고 놀란 것.
금융신뢰 심판대에 오르다
그렇다면 앞으로 사태는 어떻게 전개될까? 기자는 당국이 제일저축은행을 ‘무조건’ 구해줄 것이라고 굳게 믿는다. 은행 경영의 부실 때문이 아니라 심리공황 때문에 발생한 뱅크런을 방치해 지불불능 위기에 빠뜨린다면 전국의 모든 저축은행의 신뢰가 연쇄적으로 무너지고 나아가 한국의 금융시스템 전체가 흔들릴 수 있기 때문이다. 김석동 금융위원장이 “필요하면 자금을 지원할 것”이라고 잘라 말한 것도 이 때문이다.
제일저축 직원들도 고객들에게 인출 자제를 호소하고 있다. “중도해지하면 불필요한 금리 손실을 본다”고 설득 중이다. 이 설득이 얼마나 먹힐지 궁금하다.
어쨌거나 최근 진행되고 있는 일련의 사태는 금융에서 신뢰가 얼마나 중요한지, 일부 저축은행의 부실과 금융당국의 봐주기 검사 및 건전성 규제 관용에서 발생한 신뢰 위기가 얼마나 위험한지를 가감 없이 보여주는 교과서적 사례로 기록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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