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의 눈/오코노기 마사오]日韓 협력 시스템의 피로

  • 동아일보
  • 입력 2011년 5월 31일 03시 00분


오코노기 마사오 게이오대 명예교수 겸 동서대 석좌교수
오코노기 마사오 게이오대 명예교수 겸 동서대 석좌교수
프랑스 북부 도빌에서 개최된 주요 8개국(G8) 정상회의에서는 평소 별로 주목받지 못한 일본 총리가 주역급 대접을 받았다. 후쿠시마(福島) 제1원자력발전소의 대(大)사고 때문에 ‘원자력 안전’이 정상회의 최대 주제의 하나가 됐기 때문이다. 간 나오토(菅直人) 총리는 국제원자력기구(IAEA)를 중심으로 원자력 안전기준을 재점검하고 지진 위험이 큰 나라와 지역을 위해 새로운 기준을 마련하자고 주장했다.

유일한 원폭 피해국인 일본은 원자력발전 분야에서도 최대의 사고 경험국이 돼버렸다. 그리 명예로운 것은 아니지만, 경험이 가장 풍부한 ‘피해 선진국’이라고 할 만하다. 그 경험을 교훈 삼아 일본이 세계적인 안전기준 책정을 위해 노력한다면 결코 나쁘지만은 않다. 그러나 후쿠시마 원전사고의 가장 중요한 원인이 시스템 구축의 실패에 있다는 것을 잊어선 안 된다. 리히터 규모 9.0의 지진과 대형 쓰나미가 원전 시설에 피해를 입힌 것은 부정할 수 없지만, 그것이 대형 사고로 이어진 것은 냉각 사이클을 유지시키는 전원이 모두 나가버렸기 때문이다. 이는 명백히 시스템 구축의 실패에 기인한다.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원자로 1호기는 미국에서 설계되고 제작됐다. 구식이긴 하지만 지진에 따른 손상은 그다지 크지 않았다. 문제는 쓰나미였다. 미국에서 설계된 원전이 쓰나미를 염두에 뒀다고는 생각할 수 없다. 따라서 시스템을 도입할 때 일본 실정에 맞게 수정했어야 했다. 이를 게을리한 것, 또는 도중에 깨달았더라도 고치지 않았다는 게 최대의 실수다.

문제가 생기면 이에 개별적이고 기술적으로만 대응하려 하고, 시스템 디자인이나 시스템 관리를 경시하는 것은 일본인의 결점인지도 모른다. 따라서 새로운 원자력안전기준을 마련하는 것만으론 부족하다. 방사성 물질은 쉽게 국경을 넘어 퍼져나가기 때문에 원전사고는 한번 발생하면 국제적으로 해결하지 않으면 안 된다. 글로벌 시대의 사고 처리 시스템을 마련해야 한다는 것도 ‘후쿠시마의 교훈’일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G8에 앞서 열린 일-중-한 정상회담에서 원자력 안전뿐만 아니라 ‘방재 협력의 강화’가 합의된 것은 반길 일이다. 동북아시아 이웃국가로서 긴급사태의 조기 통보, 사고 정보의 공유, 긴급원조·물자지원 등을 위한 시스템을 구축하고, 이를 원활하게 운용하기 위해 평소에도 전문가 교류와 공동훈련을 실시해야 한다.

이번 동일본 대지진에서 가장 원활하고 효과적으로 기능한 것은 미군의 ‘도모다치(友達·친구) 작전’이었다. 지진 발생 직후 오키나와(沖繩) 주둔 미 해병대가 출동해 피해지역의 물자수송 거점인 센다이(仙臺)공항을 복구했다. 호주군도 C-17 수송기를 파견해 수송기 부족으로 출동하지 못하고 있던 자위대를 오키나와에서 공수했다. 이는 모두 일-미-호 안보협력의 성과다. 한국도 C-130 수송기로 100명 이상의 수색구조팀을 파견했다.

그런데 아쉽게도 기존 시스템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은 게 있다. 일한 협력이다. 이 시스템은 양국관계가 정상화된 1960, 70년대에 구축됐다. 조약, 협정, 규칙도 있고 일한의원연맹과 같은 조직도 있다. 가장 어려웠던 영토문제에 대해 한국의 요인(要人)은 “해결해야 한다는 것으로 해결된 것으로 간주한다”는 명언을 남겼다. 일본 측은 이를 “해결할 수 있을 때까지 잠재워 둔다”는 것으로 이해했다.

그러나 이후 반세기쯤 지나 그 시스템의 장점이 사라져버린 듯하다. 당장이라도 영토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일한 양국에서 힘을 얻어 감정적 마찰을 키우고 있다. 일본의 큰 정당이 조선왕실의궤 반환에 반대 의견을 내거나 한국의 유력 의원이 북방영토를 방문하는 것은 이례적인 사태다. 일한의원연맹은 어디 가버린 걸까. 시스템 피로가 일한 관계의 원전사고를 초래하지 않았으면 한다.

오코노기 마사오 게이오대 명예교수 겸 동서대 석좌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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