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광장/백경학]삼성 면접에서 이건희 회장을 만난다면

  • 동아일보
  • 입력 2011년 6월 9일 03시 00분


백경학 푸르메재단 상임이사
백경학 푸르메재단 상임이사
지난주 고 이병철 삼성 회장의 정신을 기리는 호암상 시상식에 참석할 기회가 있었습니다. 이 자리에는 이건희 회장 부부와 김황식 국무총리, 전직 총리 세 명과 전·현직 장관, 이재용 삼성전자 사장 등 이 회장의 세 자녀, 대학 총장, 시중은행장, 기업 대표 등 500여 명이 참석했습니다. 바쁜 시간에 한국사회를 움직이는 많은 사람을 한데 모을 수 있는 것만으로도 ‘참 대단하다’는 감탄사가 나왔습니다. 말로 듣던 ‘경제대통령’의 위력을 실감하는 자리였습니다.

갑자기 23년 전 일이 생각났습니다. “왜 삼성에 지원했나요? 대학생들이 삼성을 적대적으로 보는 이유가 뭡니까?” 서울올림픽으로 떠들썩했던 1988년 삼성계열사 사장단 면접에서 쏟아진 질문입니다.

민주화의 봄은 신군부의 등장으로 그 화려했던 짧은 생을 마감했습니다. 그 혹독한 세월 대학을 졸업한 저는 군대에 가면서 기자가 되겠다고 다짐했습니다.

1988년 12월 제대하자 아쉽게도 언론사 시험이 모두 끝나 있었습니다. 그때 우연히 삼성의 신입사원 채용광고가 눈이 들어왔습니다. 당시 삼성은 신군부의 특혜로 성장하고 있다는 비판과 일을 제대로 배울 수 있는 전망 있는 기업이라는 상반된 평가를 받고 있었습니다. 여기저기서 ‘삼성, 삼성’ 하는 말들이 들렸습니다. 입사할 생각은 없었지만 이건희 회장이 어떤 철학을 가졌고, 삼성이 어떤 기업인지 알고 싶었습니다.

23년전 사장단 면접의 기억

1938년 자본금 3만 원(현재 3억 원)으로 대구에서 출발한 삼성은 1987년 매출 14조 원, 37개 계열사를 거느린 재벌로 성장했습니다. 다른 기업이 가전과 종합상사 중심에 매달려 있을 때 삼성은 반도체를 들고 나와 정보기술(IT)시대를 열었습니다. ‘마누라와 자식 빼놓고 모든 것을 바꾸라’는 이건희 회장의 ‘신경영철학’이 잉태되던 시기입니다.

다른 기업이 필기시험과 면접을 통해 신입사원을 채용했지만 삼성은 달랐습니다. 필기시험과 주제 토론, 여러 차례 면접을 거치면서 ‘나는 이런 생각과 성향을 가진 사람입니다’ 하고 벌거벗는 느낌이었습니다.

최종 면접에는 이건희 회장과 관상 보는 사람이 배석한다고 기대했는데 불행히도 이 회장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습니다. “왜 역사학을 전공했느냐?” 하는 것을 시작으로 “데모를 했느냐?” “삼성을 어떻게 평가하느냐?” 등 질문이 쏟아졌습니다. 저는 삼성이 가진 많은 장점에도 불구하고 노조를 탄압하고 하청기업에 일방적인 희생을 요구하는 등 개선해야 할 기업문화를 가지고 있다고 비판했습니다.

이때부터 사장님 얼굴들이 벌겋게 상기되고 눈에서 불똥이 튀더니 아예 자리에서 일어나 질문을 퍼부었습니다. 10분이면 끝날 면접이 험악한 분위기 속에서 30분을 넘겼습니다. 이날 제 덕분에 면접장에 들어간 다른 두 사람은 몇 마디 하지 않고 합격됐다고 합니다.

지난해 삼성전자는 매출액이 국내총생산의 15%인 153조 원, 영업이익 17조2000억 원의 초대형 기업이 됐습니다. 삼성그룹, 특히 삼성전자를 한국을 대표하는 기업으로 꼽는 데 이견이 없습니다. ‘삼성이 망하면 한국이 망한다’는 말까지 들립니다. 하지만 ‘삼성이 국민들로부터 사랑받는 일류기업인가’ 하는 질문에는 이견이 많습니다. 삼성이 일보다 사람을 가치의 중심에 두고 투명한 윤리경영을 실천하고 있는지요. 무엇보다 사회로부터 벌어들인 이윤을 그 사회의 구성원들과 공유하고 있는지요.

이건희 회장이 매년 1000억 원이 넘는 돈을 배당받고 임원들에게 수십억 원의 상여금을 나눠준다 해도 뭐라 할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나 국민들은 삼성이 내 가족, 내 직원을 챙기는 것에서 끝나지 않고 그 누구도 하지 못한 더 큰 역할을 해주길 바라고 있습니다.

그래서 만일 제가 다시 삼성 신입사원 면접장에서 이건희 회장을 만난다면 이런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사회공헌 사업이 삼성의 미래”

“삼성을 세계적인 기업으로 이끈 당신의 판단은 옳았습니다. 하지만 일본 중국과 경쟁해 앞으로 10년 뒤 뭘 먹고살까 하는 걱정은 이제부터 전문경영인에게 맡겨 주십시오. 그 대신 회장님께서는 앞으로 100년, 아니 200년 삼성이 세계의 일류기업으로 남을 수 있는 초인류적 사회공헌 프로그램을 만드는 데 몰두해 주십시오.”

작은 재단에서 일하는 저는 매일 가난과 장애라는 이중 고통을 겪고 있는 장애어린이를 만납니다. 이들이 살아가면서 흘릴 눈물을 생각하면 삼성이 어린이재활병원을 세우는 것이 그 무엇보다 의미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어린이가 치료받은 뒤 가정으로 돌아가고 자라서 직업을 가지고 살아갈 수 있다면 그보다 위대한 프로그램이 어디 있습니까.

삼성이 큰 비전을 가지고 ‘통 큰’ 사회공헌활동을 시작하길 기대합니다. 그게 첨단 제품을 개발하는 것 못지않게 가치 있고 세계평화에도 기여하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백경학 푸르메재단 상임이사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댓글 0

지금 뜨는 뉴스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