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축과 은행. 돈과 관련된 것 중 이보다 더 높은 가치가 있을까. 저축이란 씀씀이의 지고지선이고 은행이란 지구가 멸망하지 않는 한 뼈 빠지게 번 내 돈을 최고로 안전하게 맡길 수 있는 곳이다. 그런데 요즘 부산저축은행 사고를 보면 그 신뢰에 쩡쩡 금 가는 소리가 쉴 새 없이 들린다. 그들에게나 내게나 같다. 은행은 신뢰의 최후 보루다. 정부가 금융감독원까지 두고 ‘감독’ ‘감시’해서다. 그런데 아니었다. 내 피 같은 돈은 잘 감시하라고 낙하산까지 태워 자리에 앉혀준 인물님까지 가세한 총체적 비리로 날아갔다. 더 이상 믿을 곳이 없어진 지금. 그 분노가 하늘을 찌를 것임은 우리 모두 알고도 남는다.
금융기관에서 신뢰를 빼면 과연 무엇이 남을는지. 세계 굴지의 신용카드 회사인 미국의 아메리칸익스프레스가 그 답을 보여준다. 이 회사는 이름에서도 읽을 수 있듯 창업 당시(1850년)에는 택배회사였다. 당시는 서부개척기여서 뉴욕 소재 은행(본점)은 자금 수요가 많은 개척지에 지점을 두고 현금과 전표 등 금융상품을 매일 수송했다. 그 일을 맡은 게 아멕스인데 5년 후 사고를 당한다. 아이오와 주정부 자금 5만 달러가 뉴욕 재무부로 수송 도중 사라진 것. 아멕스는 5만 달러에다 이자까지 붙여 지불했다. 어떤 경우에도 어기지 않을 것이라는 ‘지불 약속’을 지킨 것이다. 이후 아멕스라는 브랜드가 미국 사회에서 신뢰의 표상이 됐음은 물론이다. ‘아메리칸익스프레스’라고 쓰인 돈 상자 위에 누운 개의 사진-무슨 일이 있어도 상자(고객의 돈)를 지키겠다는 회사의 의지를 담은 심벌-과 더불어.
그럼에도 아멕스는 택배회사였을 뿐 금융기관은 아니었다. 그런데 어떻게 세계 굴지의 신용카드 회사로 성장할 수 있었을까. 역시 신뢰였다. 이번에는 미국 우편국의 ‘머니오더(Money order·1882년 개발된 소액환어음으로 지금도 일반가정에서 상용)’가 계기였다. 현금 수송의 필요를 없앤 이 금융상품으로 아멕스는 기로에 섰다. 하지만 위기는 기회. 아멕스는 머니오더를 능가할 금융상품을 고안했고 이걸로 금융업에 진출했다. 지금도 전 세계에서 애용되는 ‘여행자수표(Traveler’s check)’다.
TC라고 불리는 여행자수표에는 ‘푸른 지폐’라는 별명이 붙어 있다. 아멕스카드와 마찬가지로 수표 한가운데 ‘센추리온’(투구 쓴 로마 전사의 옆얼굴 모습)을 제외한 전 면이 푸른색인 데다 전 세계 어디에서나 통용되는 ‘세계 화폐’여서다. 이런 명성도 거저 얻어지지는 않았다. 때는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한 1914년. 유럽이 전화에 휩싸이자 모든 은행이 문을 닫았다. 이 때문에 유럽에 체류 중인 미국 기업 임직원과 여행자(당시 15만 명)는 현금 부족에 시달릴 운명에 놓인다. 이때도 아멕스는 원칙에 충실했다. ‘지불은 무슨 일이 있어도 실행된다’는 ‘지불 약속’이었다. 그들은 전운이 감돌자 막대한 현금을 유럽 각 지점에 보내 지불 요청에 대비했다. 파리와 런던 암스테르담 프랑크푸르트 지점이 TC와 머니오더, 유가증권을 현금화하려는 미국인들로 장사진을 이룬 건 그 직후다.
아멕스카드의 지불 약속. 이건 ‘신용’을 근간으로 하는 금융업의 원칙이자 초석이다. 그리고 이젠 어느 누구도 부인하지 않는 금융업의 알파이자 오메가다. 저축은행이라 하더라도 다르지 않다. 정부가 감독 책무를 다하지 못해 생긴 구조적 피해라면 더더군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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