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냥 이대로만이라도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콧대 높은 문화의 자존심 파리의 심장을 대한민국 젊은이들이 언제라도 저렇게 시원하게 점령할 수만 있다면 말이다. 10, 11일 저녁 파리의 제니트 공연장에서 펼쳐진 아이돌 그룹의 3시간 30분짜리 공연을 보고 유럽의 케이팝(K-pop·한국대중가요) 열풍을 체감하며 떠오른 단상이다.
1980년대 후반 대학을 다닌 386세대로서 솔직히 소녀시대와 슈퍼주니어, 샤이니, f(x) 멤버들의 이름과 얼굴조차 제대로 구분하지 못하는 기자에게 이번 공연 취재는 일종의 ‘시험’이었다. 알지도 못하는 노래를 44곡이나, 그것도 고막이 터질 것 같은 스피커 음향 속에서, 다양한 피부색을 가진 관객이 과연 어떻게 반응하는지 제대로 알 수 있을까 걱정스러웠다.
그러나 기우였다. 케이팝 전사들의 공연은 굳이 멤버들의 얼굴이나 가사를 일일이 알아야 할 필요가 없었다. 누가 봐도 절로 흥이 나고 어깨가 들썩거리는 초대형 스펙터클이었다. 숨 돌릴 틈을 주지 않는 빠른 음악과 현란한 춤은 기본. 슈퍼주니어 멤버들은 코믹스러운 여장으로 레이디 가가와 비욘세를 패러디해 웃음을 자아내고 샤이니의 온유는 오페라 ‘투란도트’의 아리아 ‘공주는 잠 못 이루고’를 부른다. 현란한 조명과 전광판의 특수효과, 와이어로 공중을 떠다니며 손에서는 레이저를 발사하는 볼거리도 많다. 아이돌의 얼굴과 몸에서 쏟아지는 땀을 보면서 환호하지 않을 여성 팬이 어디 있겠는가.
공교롭게도 소녀시대가 파리에 도착한 7일 저녁 파리의 한국문화원에선 작가 신경숙 씨의 ‘엄마를 부탁해’ 프랑스어판 출판기념회가 있었다. 책을 출간한 현지 출판사의 편집인은 책을 내기로 결정한 이유를 “누구에게나 엄마는 있고 그동안 유럽인이 잊고 살았던 엄마의 존재를 새롭게 일깨워 줬다”고 설명했다.
아이돌 그룹과 신 씨는 누구나 느끼고 공감할 수 있는 보편성을 무기로 서구 시장에 상륙하고 있다. 프랑스의 아시아 문화 웹진 ‘오리앙-엑스트렘’의 에리크 우들레 팀장은 “한국 아이돌 그룹은 서구적 요소가 많아 유럽의 거부감이 덜하고 공연은 스펙터클한 면이 매우 뛰어나 성공할 가능성이 충분하다”고 평했다. 아이돌 그룹과 일하는 작곡가의 절반은 유럽 출신이다. 안무는 주로 미국 전문가들이 담당한다.
물론 조심스러운 시각도 없지 않다. 프랑스의 주류 사회를 움직이려면 아직 멀었다는 것. 프랑스 청소년들은 케이팝에, 여대생과 직장 여성은 감성적인 한국 영화와 드라마에 빠져들고 있지만 아직은 그들에게만 국한돼 있다는 얘기다. 홍석경 보르도대 교수는 11일 공연을 본 뒤 “인터넷에만 의존하지 말고 유럽 각국에 CD와 DVD를 내놓고 음악과 공연 시장을 좌우하는 라디오와 주류 매체에 침투해야 한다”고 말했다. 영화, 소설, 음악 장르에서 오프라인 시장이 상대적으로 더 중요한 곳이 유럽이기 때문이다.
SM이 과학적 분석과 예측으로 인재를 선별한 뒤 팀당 20억 원이라는 거액을 들여 글로벌 스타로 양성하는 독자적 시스템을 구축하고 세계 각국의 작곡가, 프로듀서들과 네트워크를 만든 것은 분명 평가할 만한 일이다. 하지만 유럽의 문화 시장을 아시아나 미국과 동질시하면 안 된다는 생각이다. 시대는 변했지만 아직도 산업적 접근과 기계적 분석, 디지털적 사고에 주로 의존하는 미국적 방식을 가장 꺼리는 곳이 유럽이다. 쇼와 스펙터클을 넘어 이들의 가슴을 진정으로 울리려면 아날로그 마인드를 배려하는 예술적 영감과 창조적 상상력이 뒤따라야 한다. 또 과도한 신비주의나 상업주의적 근성은 금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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