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 3월 기획재정부 정책조정국은 식당을 빌려 워크숍을 했다. 프로그램 중에 직원들과 국·과장들이 ‘서로에게 하고 싶은 말 5가지’를 알아맞히는 순서가 있었다. 이 게임을 위해 직원 및 국·과장들은 사전에 따로 모여 ‘하고 싶은 말 5가지’를 선정하는 작업을 했다.
직원들은 국·과장이 바라는 것을 비교적 쉽게 맞혔다. ‘내가 장관이다 하는 마음으로 정책을 대하라’ ‘남 일, 세상일에도 관심을!’ 등이 정답이었다. 간부들은 식사자리에서도 이런 말을 자주 하기 때문에 어렵지 않았던 것. 그런 자세로 일하지 않으면 주요 부서 간부로 승진하기 힘든 조직이기도 하다.
“불만 없다”는 부하직원들
반면 간부들은 ‘국·과장님이 솔선해 연가(年暇)를 사용해 주세요’ 등 직원들의 희망을 잘 맞히지 못했다. 아이로니컬하게도 ‘직원들이 하고 싶은 말 No.1’이 가장 어려웠다. 사회자는 국·과장의 퀴즈 실력으로 보아 정답이 안 나올 것으로 보고 바로 힌트를 줬다. “정답은 ‘○○○○ 없습니다’ 입니다. 뭐가 없다는 걸까요?”
뭐가 없다는 거지? 업무폭주로 밤늦게 심지어 새벽에 퇴근하고, 휴일 출근도 다반사인 재정부의 근무환경을 떠올린 상사들은 ‘남은 에너지가 없습니다’ ‘사생활이 없습니다’ ‘데이트할 시간 없습니다’ 등을 제시했지만 다 틀려 벌주를 마셨다.
가림막을 떼자 답은 놀랍게도 ‘우리는 불만 없습니다’였다. 한 간부가 말했다. “순간 뜨거운 무엇이 가슴에 치밀었다. 어찌 불만이 없겠는가. 왜 이것을 1번 답으로 하겠다고 의견을 모았을까. 힘들지만, 상사들이 솔선하고 있으며 최선을 다해 부하를 돌보고 있음을 믿는다는 뜻일까?” 기자 역시 과천 공직자들의 헌신적 업무태도를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얘기를 듣고는 가슴이 찡해졌다.
기자의 경험 한 토막. 집값이 들썩이던 1990년대 초반, 옛 경제기획원에서 부동산 문제를 담당하고 있던 임상규 과장(전 농림부 장관, 순천대 총장)과 대화하던 중 기자가 ‘투기꾼 망국론’을 언급했다. 그의 반응은 예상 밖이었다.
“허 기자, 그 사람들 욕하면 안 됩니다. 시민이 이익을 좇는 것은 당연합니다. 어떤 나라에서는 국민에게 수익 기회를 제시해도 종교적, 문화적 배경 때문인지 움직이지 않습니다. 그런 여건에서는 정책효과가 안 나타납니다. 압축성장도 불가능합니다. 문제가 되는 것은 ‘이익을 좇는 국민’이 아니라 ‘부동산을 사면 돈 벌게 돼 있는 경제환경’입니다. 이런 상황을 만든 정부당국과 경제시스템의 잘못입니다.” 기자는 망치로 뒤통수를 맞는 느낌이었다. 함바 비리 수사를 받던 중 죽음을 택한 임상규 씨가 어떤 잘못을 했는지 기자는 모른다. 앞으로 밝혀지기도 힘들게 됐다. 다만 그의 정책철학만큼은 오랫동안 잊혀지지 않을 것 같다.
이들의 땀과 사명감으로…
최근 윤증현 재정부 장관이 물러나면서 직원들에게 남긴 당부가 화제다. “유행처럼 번져나가는 ‘무상(無償)’이라는 주술에 맞서다가 재정부가 사방에서 고립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 고립을 두려워해선 안 된다. 우리는 재정의 마지막 방파제가 돼야 한다.” 진실과 진심을 담은 이임사라고 본다. 후임 박재완 장관도 “우후죽순의 복지 포퓰리즘에 맞서 레오니다스가 이끌던 300명의 최정예 전사처럼 테르모필레 협곡을 굳건히 지켜야 한다. 당장 편한 길보다는 미래 세대를 위해 가시밭길을 선택하자”는 취임사로 답했다.
현실에서는 이런 주장이 패한 경우가 많았다. 선거를 앞두고 미리 알아서 팽창예산을 짜는 장관도 있었다. 하지만 한국이 남다른 재정건전성을 유지하고 있는 것은 눈앞보다는 먼 미래를 생각하는 선배 공직자들의 자세에 힘입은 바 클 것이다. 예전부터 예산실은 여름이 가장 바쁘다. 다음 해 예산안을 짜느라 휴가를 잘 못 간다. 내년은 선거가 겹친 해, 팽창의 유혹이 클 때다. 이들의 땀과 사명감이 재정 건강을 지켜낼 수 있을까, 궁금하고 걱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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