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윗물이 맑아야 아랫물이 맑다’란 속담이 있다. 하지만 요즘 일본을 보면 꼭 그렇지만은 않은 것 같다.
일본 정치권은 대지진과 지진해일(쓰나미), 원전사고 등 ‘1000년 만의 대재앙’이 겹친 비상시국이라고는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정쟁에 한창이다. 이달 초엔 야당이 국회에 총리불신임안을 제출해 여당과 극한 대결을 벌였고, 여당 내에서도 권력투쟁이 끊이지 않고 있다. 각료와 당직자, 총리보좌관마저 공공연히 총리에게 반기를 들고 있다. 법 제정이 늦어져 대지진 발생 106일 만인 24일에야 재해복구를 전담할 부흥상이 임명됐다.
이런 정부와 정치권이 국민에게는 참 많이도 요구한다. 재해복구를 위해 세금 인상이 불가피하다며 손을 벌릴 태세고, 덥고 불편해도 전기를 아껴 달라고 호소한다. 이쯤 되면 국민들 입에선 ‘너나 잘하세요’란 말이 절로 나올 법하다.
하지만 최근 전력사용량 통계를 보면서 성숙한 시민의식이 무엇인지 새삼 깨닫게 됐다. 무더위가 찾아온 22일과 23일의 전력사용량은 의외로 오후 4∼5시가 최대였다. 상식적인 여름 피크타임인 오후 2시 전후엔 이보다 낮았다. 여기엔 국민의 자발적 시민정신이 숨어 있다.
원전사고로 올여름 전력 비상이 걸린 가운데 최근 무더위가 찾아오자 정부는 “오후 2시를 전후해 전력 수요를 감당할 수 없을지도 모르니 절전해 달라”고 호소했다. 일부 지역엔 이 시간대에 섭씨 35도를 넘는 불볕더위가 기승을 부렸다. ‘자기들은 정치싸움이나 벌이는 마당에 나 같은 사람이 왜 고생을 사서 하나’라는 생각으로 절전 요청을 무시할 법도 하건만, 시민들은 정부 호소에 따랐다. 누가 지켜보는 것도 아닌데 너도나도 무더위를 묵묵히 참다가 오후 4시가 지나서야 에어컨을 켜기 시작했다.
일본 국민이 의사표현을 전혀 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각종 여론조사에서 ‘정부의 원전 대응을 신뢰할 수 없다’는 응답이 80%를 넘고, 총리를 바꿔야 한다는 여론도 절반 이상이다. 최근엔 원전폐기 시위도 곳곳에서 벌어진다. 하지만 그 시위 또한 폭력과는 거리가 멀다.
시민사회의 주인은 몇몇 정치인이 아닌 대다수 시민이다. 일본 국민은 죽음의 공포에 내몰린 3·11 동일본 대지진 때도 차분하게 질서를 지켰다. ‘무엇이 공동체를 위한 일인지’ 무언의 공감대 속에서, 할 말은 하면서도 지킬 것은 지키는 이들의 시민의식이 놀라울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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