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같은 사람들은 자본주의를 지켜야 한다. 자본주의를 지키려면 한나라당을 찍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과거 선거 때마다 가까운 사람 중에 다른 당을 찍으려는 사람들을 설득하기도 했다. 그런데 이젠 모르겠다. 솔직히 내년 총선과 대선에선 한나라당을 찍고 싶지 않다.”
“계열사 느는 건 자손 늘기 때문”
무엇이 그를 한나라당에 열 받게 했을까.
“나도 자본주의 국가에 와서 사업을 하고 보니 사업에도 도리가 있다는 걸 알게 됐다. 하지만 요즘 대기업은 너무 한다. 나 같은 사람들이 하는 작은 사업까지 손댄다. 비슷한 사업을 하는 사람들끼리 모이면 대기업 욕하는 소리가 쏟아진다.” ‘한나라당=대기업 우호세력’으로 인식하는 그가 대기업에 대한 반감을 표출하는 방식은 한나라당 지지 철회였다.
동석했던 사업가(물론 남한 출신)가 좌중에 질문을 던진다.
“대기업이 문어발식으로 사업을 확장해 중소기업 업종에까지 손대는 이유가 뭔 줄 아나? 계열사가 점점 많아지기 때문이다. 그럼 대기업 계열사는 왜 많아지는 줄 아는가?”
“….”
“답은 간단하다. 자손이 점점 늘기 때문이다. 서구 기업은 대체로 사업을 확장해 기업 자체가 커지는 일은 있어도 계열사 수가 점점 늘지는 않는다. 한국 대기업 오너는 자손들에게 계열사를 하나씩 떼 줘서 미래를 보장해주려고 한다. 자손은 많아지고 대기업의 고유 업종은 한계가 있다. 그래서 자질구레한 식음료 사업 등 중소기업이 해온 업종에까지 발을 뻗치는 것이다.”
그러면서 그는 “대기업 오너가 자손들이 맡은 계열사를 밀어주기 위해 ‘일감 몰아주기’를 하는 것은 변칙 상속의 문제가 아니다. 사실상 횡령이다”라고 열을 올렸다.
경제 지식이 깊지 않은 나로서는 이들의 얘기가 얼마나 실체적 진실에 들어맞는지 단언하기 어렵다. 다만 최근 들어 각종 모임이나 식사 자리에서 전에 없이 대기업을 비판하는 목소리가 높아진 것만은 분명하다. 무엇보다 먹고살 만한 자영업자나 중소기업 오너, 변호사나 공인회계사 같은 전문직종에서 이런 얘기를 하는 이가 부쩍 많아졌다.
이른바 ‘강남좌파’라서 그럴까. 얘기를 들어보면 그게 아니다. 대부분은 자신이 대기업으로부터 물질적 심리적 피해를 당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김용철 변호사의 삼성 비자금 조성의혹 폭로는 논란거리였다. 삼성으로부터 100억 원이 넘는 거액을 받은 그가 ‘자신이 마시던 우물에 침을 뱉을 자격이 있느냐’는 거였다. 그럼에도 그가 쓴 책 ‘삼성을 생각한다’가 약 16만 부나 팔린 베스트셀러가 된 이면을 삼성 관계자들은 가벼이 받아들여선 안 된다. 보너스도 변변치 않아 그렇지 않아도 추운 연말, ‘삼성이 사상 최대의 성과급을 지급했다’는 뉴스를 듣는 이들의 선망 아래 깔린 질시(嫉視)를. 삼성은 29일 “내수경기 진작에 1000억 원을 풀기로 했다”고 발표했지만, 관건은 진정성이다. 한국을 대표하는 기업 삼성이 ‘위대한 기업’이 되려면 먼저 ‘존경받는 기업’이 돼야 한다.
포퓰리즘 파도는 대기업부터 때려
유럽 귀족가문의 ‘노블레스 오블리주’는 가문을 지키는 수단이기도 했다. 전쟁이 나면 자식을 가장 먼저 참전시키고 흉년이 들면 성문을 열어 식량을 퍼줬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혁명과 전란이 빈번한 와중에 언제 가문이 쑥대밭으로 변할지 모른다는 우려가 있었다고 한다.
자유시장경제의 대표선수인 대기업 때문에 더는 시장경제가 매력적이지 않다고 느끼는 이들이 늘어나선 안 된다. 자유시장경제에 회의가 드는 순간, 연탄가스처럼 스며드는 것이 포퓰리즘이기 때문이다. 포퓰리즘의 파도가 거세지면 가장 먼저 때리는 건 대기업의 굳게 닫힌 성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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