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년 노무현 정부가 국가인권위원회 권고에 따라 공공기관 채용에 학력 제한을 철폐한 이후 고졸 채용이 현격하게 줄어들었다. 동아일보가 공공기관과 준정부기관 55곳의 지난 1년간 채용 실적을 조사한 결과 2375명 가운데 전문계고(특성화고) 출신은 전체의 1.1%인 26명에 불과했다. 그나마 20명을 채용한 가스공사는 전문계고 출신을 따로 선발한 경우였다. 선의(善意)의 정책이 반드시 좋은 결과를 가져오지는 않음을 확인해준다.
공공기관 채용기준에서 학력 제한이 사라진 것은 학력 제한이 평등권을 침해한다는 논리에 근거했다. 그러나 ‘학력 제한 없다’는 채용공고를 보고 열심히 공부해 시험에 응시한 고졸 출신은 서류전형과 필기시험을 어렵게 통과하더라도 면접에서 좌절했다. 석·박사 출신들이 즐비한 터에 고졸이 ‘신의 직장’이라는 공공기관의 좁은 문을 뚫을 수 없었던 것이다.
이명박 대통령은 고졸 은행원을 격려하는 자리에서 “나도 야간 상고 출신이다. 학력이 중요한 게 아니다”라고 말했지만 이 대통령은 고졸이 아니다. 지금 전문계고를 옛날 실업계고와 비교하는 것 자체가 무리다. 옛 실업고에는 가난한 집안 출신의 수재들이 몰려와 졸업한 뒤 산업계의 핵심 직군으로 진출했다. 하지만 지금 전문계고는 대학 진학을 위한 또 다른 통로로 인식되고 있다. 전문계고 졸업자의 대학진학률은 1990년 7.3%에서 2010년엔 71.1%로 높아졌다. 전문계고의 대학진학률이 일반고와 다를 바 없는 판에 정부가 2015년부터 동일계 특별전형을 폐지하려 들자 학부모들은 “전문계고의 대입 기회를 줄이지 말라”고 시위를 벌였다. 전문계고의 어정쩡한 위상을 보여주는 단면이다.
대학진학률이 80%를 넘어서고 대졸 백수가 넘쳐나는 현실을 타개하려면 고교만 졸업해도 질 좋은 일자리를 가질 수 있는 기회를 열어줘야 한다. 미국은 1960년대 민권법을 제정한 이후로 여성 및 흑인을 포함한 소수민족 고용목표 및 이행계획을 기업에 요구해 소수민족과 여성이 일자리를 얻어 중산층으로 이동할 수 있도록 했다. 우리는 민간에 앞서 공공기관이 먼저 고졸자를 채용해 대학 졸업장의 거품을 뺄 필요가 있다.
날마다 새로운 지식이 등장해 평생 배워야 하는 21세기는 대학 졸업장으로 공부를 마감하는 시대가 아니다. 고졸자도 직장에 다니며 사이버대학이나 방송통신대 학위를 취득할 수 있다. 대졸신화를 부추기는 고졸-대졸 간 임금격차도 줄여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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