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 3월 2일. 이명박 대통령(MB)은 “집권 3년차니 청탁이나 이권 개입 같은 문제가 안 생기도록 각별히 챙기라”고 수석회의에서 강조했다. 민정수석실은 바로 감사원 검경 실무자들로 사정기관 비공식 회의를 주재했다. 그리고 고강도 사정 태세에 들어갔다는데 민간인 사찰의혹이 터졌다. 7월 25일 MB는 민정수석에게 “사정기관 실태와 체계를 점검해 개선책을 마련하라”고 지시했다.
열 달 후인 올해 5월 26일. MB가 이번엔 민정수석실로 직접 찾아가 “우리와 관련된 사람일수록 더 철저하게 조사하라”며 질타했다. 은진수 감사원 감사위원이 부산저축은행에서 청탁과 뇌물을 받은 혐의로 사표 낸 바로 그날이었다.
대통령이 수차 강조했는데도 공직기강 못 잡고, 사정기관도 못 챙긴 민정수석이 오늘 법무부 장관 후보 청문회에 나오는 권재진 씨다. 작년 3월부터 은 씨는 브로커를 통해 형을 취직시켰고, 김종창 당시 금융감독원장에게 로비를 했으며, 세 번에 걸쳐 7000만 원을 받았다.
“장관은 (대통령의) 세크러테리(비서)인데 법무행정을 하는 법무부 장관 자리에 민정수석(비서)이 못 간다는 건 잘못된 전제”라는 청와대와 일부 한나라당 사람 말이 맞는다 하자. 그러나 민정수석의 핵심 역할이 사정을 통한 공직기강 확립과 인사검증이라면, 권 씨의 직무능력은 진작 문책당했어야 마땅하다.
공직기강-인사검증 실패한 민정
은 씨야 지난 대선 내내 MB를 괴롭혔던 ‘BBK 사건’을 방어한 공신이자 측근이어서 어쩌지 못했다 쳐도 그렇다. 함바집 브로커에게 청와대 감찰팀장이 뇌물 받고(2009년 11월), 이미 받은 경찰청장은 브로커한테 해외도피를 권한 혐의(2010년 8월)도 못 잡아냈다는 건 민정수석의 사정 능력에 문제가 있다는 얘기다.
인사검증 능력도 심각하다. 작년 8·8 개각 때 총리 후보와 장관 후보 2명이 청문회에서 낙마하자 인사검증 라인 문책론이 들끓었다. “민정수석이 인사검증에서 배제된 것 아니냐”는 당시 한나라당 김무성 원내대표 말은 더 치욕적이다. 2005년 이기준 전 교육부총리가 사외이사 겸직 논란으로 취임 사흘 만에 물러났을 때 책임지고 사표 낸 박정규 민정수석과 정찬용 인사수석, 이를 수리한 노무현 대통령이 다시 보일 정도다.
권 씨가 다음 인사검증을 잘했으면 또 모른다. 작년 12·31 개각에서 민정수석 출신 정동기 씨가 독립적 헌법기관인 감사원장의 후보로 나오기 전에, 그는 “안 된다”며 막지 못했다. 올해 5·6 개각에선 낙마가 없었다고 잘된 인사검증이랄 수도 없다. 서규용 농림수산식품부 장관이 직불금 받은 문제가 드러났지만 야당도, 국민도 그만 지쳐 포기했을 뿐이다.
그런데도 청와대에선 “권 후보자는 정책판단과 분석력, 대외조정력을 겸비했을 뿐 아니라 친화력과 온화한 성품으로 검찰 안팎에서 실력과 신망을 인정받는다”고 했다. 대체 무슨 판단력과 분석력, 조정력이 뛰어났다는 건지 물어보고 싶다. 친인척 비리로 휘청댔던 과거 정부의 집권 4년차와 비교해서라면 슬픈 일이다. 국민은 모르는 ‘다른 점’에서 유능한 거면 더 위험하다. 내년 총선과 대선 때 국민 모르게, MB한테만 보이는 능력을 발휘할까 봐서다.
민정수석으로서의 역량과 검찰 시절 또 장관이 된 뒤의 실력은 다를 수 있다. 성품만으로 좋은 장관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래도 아들 병역의혹에 대한 해명은 도덕성을 떠나 구차하다. 무엇보다 “MB는 인사가 문제”라는 국민이 많고 지역감정까지 험악해진 마당에 법무부 장관 후보자가 TK(대구 경북)라는 점은 치명적이다.
프랜시스 후쿠야마는 저서 ‘정치적 질서의 기원’에서 연고주의가 인간 본성임을 인정하면서도 “실력 아닌 연고로 공직이 채워질 때 나라가 망한다”고 했다.
안 그래도 은 씨처럼 반칙과 특권을 일삼는 기득권층을 보며 국민은 속이 뒤집힐 판이다. 대통령 부인과 누나 동생 한다는 법무부 장관이 아무리 법치와 법무행정 선진화에 매진하고, 총선과 대선에서 중립성과 공정성을 지킨다 해도 국민이 믿어줄까 의문이다. ‘정당한’ 선거사범 단속은 물론 대규모 간첩단을 적발한대도 ‘TK 법무비서’의 과잉충성으로 오해받을지 모를 일이다. 범야권에서 보면 “야당 탄압”이라고 주장할 수 있게 해주니 되레 고마운 인사가 아닐 수 없다.
“평창”으로 딴 점수 까먹을 건가
그럼에도 “마지막까지 일할 사람이 필요하다”며 권 씨를 놓지 않는 MB에 대해 적잖은 사람들이 분노하거나, 안타까워하거나, 아예 관심을 끊고 있다.
2008년 3월 19일 MB는 BBK 사건을 염두에 둔 듯 “새 정권에서 정치가 검찰권을 악용하는 일은 절대 없을 것”이라고 했다. 권 법무비서 카드는 선거전략이면 죽을 꾀이고, 임기 말과 퇴임 후 대비용이라 해도 무효패가 될 가능성이 있다. 무엇이 그리 두렵기에 MB는 국민의 마음을 잃어도 상관없다는 건지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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