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 말로는 중국군은 며칠간 묵었던 마을을 떠나면서 고마움을 표시했다. 눈물을 글썽이면서 몇 번이나 뒤돌아보며 손을 흔든 어린 병사도 있었다. 병사들 중에는 우리말을 하는 조선족이 많았다. 내가 태어나고 자란 충북 단양에서 60년 전에 벌어졌던 일이다.
살기 위해 먹을거리를 제공할 수밖에 없었던 한국의 시골사람들과 어떤 인연을 맺었든 당시 중국군은 통일 방해 세력이었다. 세계 제2의 경제대국이자 한국의 최대 무역 상대국인 중국은 그간 6·25전쟁에 대해 “정당한 항미원조(抗美援朝) 전쟁이었다”고 주장해왔다. 브루스 커밍스의 수정주의는 본의 아니게 이 궤변에 힘을 보태고 있다.
논쟁거리도 아닌 일을 새삼 들먹이는 건 중국이 여전히 한반도 통일에 걸림돌이 될 것이라는 우려 때문이다. 군사외교 전문지 디앤디포커스 8월호는 북한 급변사태 시 중국의 개입을 용인한다는 미국의 방침에 이명박 정부가 동의했다고 보도했다. 한미연합사령부가 거의 작성을 마친 ‘개념계획 5029’의 부속문서에 이런 내용이 담겼다는 것이다. 핵심 내용은 두 가지. 첫째, 미국은 중국이 개입할 경우 충돌을 피한다. 둘째, 북한의 대량살상무기를 중국과 공동으로 관리한다. 어느 것이나 한국 주도의 통일전략에 어긋난다.
국방부는 부인하지만 개연성이 있다. 대통령에게 이 문제를 보고한 당사자로 지목된 김태영 전 국방부 장관은 “기억나지 않는다”면서 “초보적인 논의가 있었지만 내가 있을 땐 아무것도 결정되지 않았다”고 밝혔다. “몇 년 전 하나의 안으로 논의됐던 내용을 과장한 것 같다”는 국방부 김민석 대변인의 답변도 맥락을 같이한다. 참여정부 때도 그런 얘기가 흘러나왔다. 북한에서 급변사태가 발생하면 미군을 투입해 대량살상무기를 접수한다는 미국의 계획은 한국 정부의 반발로 무산됐다. 미군이 진주하면 중국군이 개입할 여지가 있다는 우려도 반대 이유 중 하나였다. 당시 동북아시대위원장이던 문정인 교수에 따르면 “대량살상무기 제거는 중국과 협의해야 한다”는 얘기가 있었지만 깊이 논의되지는 않았다.
북한 급변사태 시 중국의 미사일 위협이나 미중 간의 거래 때문에 미국의 항공모함이 한반도에 오지 않는 시나리오를 제시하는 군사전문가도 있다. 군사평론가 김종대 씨는 한국을 배제한 미국과 중국의 타협이 ‘21세기판 얄타체제’를 만들지도 모른다고 우려한다. 중국이 유사시 대동강 이북 지역을 점령해 치안을 유지하고 주민 탈출을 봉쇄하는 계획을 세웠다는 구체적 주장도 제기됐다. 백승주 한국국방연구원(KIDA) 안보전략연구센터장은 가능성이 낮다는 걸 전제로 파국을 맞은 북한이 한국 정부에 개입을 요청하면 한국군이 주도권을 쥘 수 있는 명분이 생긴다고 주장한다. 북한의 내전과 중국군 개입을 다룬 이원호 씨의 전쟁소설 ‘2014’는 이 같은 가정에 흥미롭게 살을 붙였다.
교조적으로 한미동맹에 의존하다가는 낭패를 볼 수 있다. 한미동맹을 바탕으로 중국의 개입을 최소화하면서 통일을 이룰 수 있는 전략과 논리 개발이 필요하다. 외세의 협조와 차단을 철저히 구분한 독일의 통일전략을 참고할 만하다. 정부는 북한 붕괴가 곧 통일이 아니라는 점을 국민에게 제대로 알려야 한다. “통일은 도둑처럼 올 것”이라는 대통령의 말이 미덥지 않아 하는 얘기는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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