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한 나라만의 문제가 아니다. 미국의 신용등급 강등, 유럽 재정위기, 영국 청년폭동, 한국의 등록금 및 급식 논쟁이 모두 같은 뿌리에서 시작됐다. 양극화와 중산층 해체가 그것이다. 우리를 더욱 난감케 하는 것은 이것이 본질적으로 글로벌 시장화의 부산물이라는 점이다. 시장경제가 주는 효율을 극대화하는 과정에 양극화와 금융불안이 누적됐고, 이를 무마하기 위해 재정자금을 쏟아붓다가 생겨난 일들이다.
글로벌 재정위기의 뿌리
그렇다고 시장을 포기할 수는 없다. 시장경제는 개인의 이기심마저 사회 전체의 이익으로 승화시킨다. 이보다 훌륭한 자원배분 메커니즘은 아직 발견되지 않았다. 매 순간의 선택에 대해 당사자에게 또박또박 책임을 지우는 시장경제만큼 멋진 도덕적 해이 감독 시스템도 없다. 지금 시장경제를 포기하자는 것은 배가 비틀거린다고 해서 바다에 뛰어내리자는 것이다.
지금까지 각국은 복지 확대로 양극화를 완화했다. 금융거품 붕괴의 통증을 재정거품 주입으로 다스렸다. 불가피한 측면이 크다. 통합과 공동체 유지는 국가의 존재 이유이기 때문이다. 지속가능한 발전을 위해서는 환경-기후-자원 못지않게 통합과 안정이 중요하다. 국내 상황도 비슷하다. 미국-유럽 문제의 뿌리가 ‘방만한 재정’인 것은 분명하지만 그렇다고 ‘재정을 수호해야 한다’는 단문(短文)만으로는 문제가 종결되지 않는다.
하지만 재정을 통한 경기 부양-금융 지원-복지 확대의 결과가 유럽의 재정위기이며 미국 신용등급 하락이었다. 공공부채에 의존해 사회를 지탱해온 처방 역시 지속 불가능하다. 말이 처방이지 사실은 문제를 미루고 회피해온 것이다.
전망은 더 비관적이다. 경제의 국경이 낮아지면서 시장의 힘은 더 커지고, 양극화는 전 지구적 차원에서 가속화하고 있다. 반면 개별 국가의 정치권력-정책권력은 힘을 잃어가고 있다. 주요 선진경제는 정부 부채가 국내총생산(GDP)을 초과하는 등 실탄마저 소진했다. 그렇지만 국경을 넘나드는 초국적 자본 앞에, 또 국가경쟁력 저하라는 경고 앞에 어느 누구도 증세(增稅)를 밀어붙이기 어렵다. 민간 위기는 정부가 봉합했지만 정부 위기는 누가 해결해줄 수도 없다.
선택할 수 있는 대안이 많지 않다. 국내적으로는 재정을 다잡고 포퓰리즘을 경계하되 휴머니즘과 사회적 책임 쪽으로 선회하는 수밖에 없다. 동반성장이나 상생, 이명박 대통령이 주창한 ‘공생(共生)발전’이 모두 그런 취지일 게다. 은행 기업 가계는 각자 어려운 시기를 단단히 대비해야 한다.
하지만 앞서 언급했듯 개별 국가의 권능에는 한계가 많다. 자칫 “나부터 살겠다”며 환율전쟁을 벌이다 모두가 죽는 근린궁핍화의 덫에 빠질 공산이 크다. ‘유로존 경제정부’ 창설 논의 등에서 보듯 국제 공조가 어느 때보다 긴요하다. 문제는 어떻게 글로벌 리더십을 회복하고, 또 제도화할 것인가 하는 것이다.
새로운 국제 권력체 필요
유엔이나 국제통화기금(IMF), 세계무역기구(WTO)의 기존 커버리지로는 어림없다. 중국이 빠진 주요 8개국(G8)도 한계가 크다. 주요 20개국(G20)은 겉모습만 멋질 뿐 아직 무력하다. 오히려 재정위기 앞에 풍전등화 신세다. 새로운 국제 권력체의 디자인은 피할 수 없는, 그러나 지난한 과제다.
어렵다고 논의를 멈출 수는 없다. 시장주의와 민주주의라는, 자유주의와 공동체주의라는 우리 사회를 지탱하는 두 수레바퀴 중 어느 하나도 포기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런 번민의 과정을 통해 우리는 공공부채로 지탱되는 공동체가 아니라, 효율적이되 약자와 공존하는 생산-분배 시스템의 재건을 위한 실마리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아프리카 마사이족에게 이런 속담이 있다. “빨리 가려면 혼자 가고, 멀리 가려면 함께 가라.” 국가공동체 내에서도, 글로벌 규모에서도 되새겨야 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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