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정보기술(IT)시장이 요동치고 있다. 불과 한 달 사이에 노키아의 몰락, 애플의 세계 시가총액 1위 등극, 구글의 모토로라 모빌리티사업부 인수, HP의 PC사업부 매각 및 웹OS사업 철수 결정 등이 가시화됐다. HP의 PC사업 매각 선언은 그 상징성으로 볼 때 IT시장 지각변동 시리즈의 화룡점정이라 할 수 있겠다.
환골탈태하는 글로벌 IT리더들
세계 1위 기업이 자발적으로 시장을 버린 HP의 결정은 PC산업의 쇠퇴를 극명하게 보여준다. IBM과 HP는 수십 년간 컴퓨터 하드웨어 관련 제조업체로 강인한 인상을 심어주던 기업이다. 이런 기업들이 산업 성장성이 정체됐다고 핵심 업종을 바꿔 서비스 및 소프트웨어 업종으로의 변신을 감행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IBM의 신속한 선제 대응은 이 회사 창립 100주년인 지금 제2의 중흥기를 누리게 했다. 패러다임과 환경의 부침이 잦은 IT산업에서 과감하고 신속한 결정은 기업의 사활을 결정짓는다. 반면 한국의 글로벌 IT기업들은 그룹사 매출에 의존하는 소프트웨어 자회사 정도로 영위해 왔기에 핵심 업종 전환 등은 쉽지 않을 듯하다.
IT산업 가치사슬은 원자재, 부품, 소프트웨어, 제조, 서비스, 콘텐츠가 유기적으로 연결된 구조다. 부가가치가 높은 스마트기기의 경우 소프트웨어와 콘텐츠의 경쟁력이 더욱 부각된다. 애플의 경우 하청업체에 대한 품질관리 및 규모의 경제를 통한 원가 절감에 정평이 나 있다. 원하는 제품 디자인을 위해 고가의 생산 장비를 구매하기도 한다. 소프트웨어 개발자를 위한 지원과 콘텐츠사업자와의 협상능력도 뛰어나다. 강력히 통제되고 정제된 유통채널을 통해 독특한 소비자 관리 경험도 선사한다. 구글의 경우 콘텐츠 축적 노력을 꾸준히 진행해 왔고 모토로라 모빌리티사업부를 비롯한 다수의 인수합병으로 가치사슬상의 리더십이 한층 강화될 것으로 전망된다. 이처럼 기업 중심으로 가치사슬이 조율되는 미국과는 달리 한국에서는 과거 정부가 혁신의 방향 등에 대해 중장기 리더십을 발휘했다. 최근 수년간 한국 IT산업에는 패러다임 변화에 대한 비전 제시, 가치사슬 조율의 리더십 등의 기능이 실종된 듯하다. 정보통신부가 폐지된 배경에는 미국과 같이 민간기업들의 역량이 충분하다는 논리가 깔려 있었는데 작금의 상황을 보면 꼭 그렇지만도 않은 것 같다.
동적인 IT산업의 속성상 시장의 강자가 계속 바뀌는 것은 자연스럽고 반드시 필요하다. 미국의 IT산업이 끊임없는 혁신을 통해 전 세계를 지배하는 것은 혁신으로 무장한 새로운 기업들이 대거 진입하고 처절한 경쟁을 거쳐 소비자의 마음에 진정하게 부합하는 일부는 그 대가를 충분히 보상받는 구조이기 때문이다. 벤처기업들의 열악한 환경, 건전한 인수합병문화의 미비, 검증된 투자만 진행하는 벤처캐피털업계의 성향, 그리고 동반성장 정책이 표류하고 있는 국내 상황과는 거리가 느껴진다.
IT 패러다임 변화 따라잡아야
얼마 전 미 실리콘밸리에서 성공적으로 활동하는 벤처캐피털 기업인을 만나 소프트웨어 및 콘텐츠 분야에서 글로벌시장으로의 진출을 유도할 방안에 대해 물었다. 돌아온 답변은 “솔직히 별로 기대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글로벌 벤처캐피털 사업자의 마음을 움직이려면 기본적인 언어, 문화적 자질은 물론이고 산업에 대한 현실 감각, 사업계획서의 완벽성, 인재풀의 매력도 등 다양한 요건이 평가되는데 이에 대한 대비가 매우 부족하다는 이유였다.
글로벌 IT산업의 격변기가 지나면 신규 시장이 다수 창출될 것이고 부가가치와 파급력이 높은 소프트웨어와 플랫폼 역량이 높은 기업들이 글로벌시장을 호령할 것이다. 한국 IT산업은 지난 수년간 무엇을 준비해 왔는가. 환골탈태하는 글로벌 IT 리더들의 모습을 보며 불안감이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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