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광장/유병규]한국경제의 패배주의를 경계한다

  • 동아일보
  • 입력 2011년 8월 23일 03시 00분


유병규 현대경제연구원 경제연구본부장
유병규 현대경제연구원 경제연구본부장
본격적인 경제개발을 시작한 지 40년이 된 한국 경제가 깊은 고뇌에 빠져 있다. 외환위기 이후 성장동력이 약화되는 가운데 분배 구조는 악화되고 세계에서 가장 빠른 저출산 고령화 등으로 복지 부담은 가중되고 있다. 안타깝게도 새로운 활로를 쉽게 찾지 못하는 가운데 한국 경제는 패배주의에 휩싸였다. 더는 성장하기 어렵고 힘든 상황이니 2만 달러 소득 수준에서 다 같이 편히 살자는 생각이 확산되고 있는 것이다. 배타주의, 온정주의, 공유주의, 복고주의가 이를 대표한다. 형평성을 중시하는 사회학적 가치관은 정치 사회 안정을 위해 필요하다. 문제는 지나치면 경제 활력을 손상시켜 정치 사회 부담을 가중하는 역효과를 초래한다는 점이다. 이 세상에는 한국 경제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지금 이 순간에도 세계 각국은 치열한 생존 경쟁에 직면해 있다. 국내 경제가 끊임없이 생존 능력을 확보하지 못하면 그야말로 한순간에 한국이 향유하는 모든 경제적 혜택을 상실할 위험성이 높다. 무엇보다 우리 경제에 배타주의가 팽배해 걱정이다. 더 많은 경제적 이득을 향유하고 있는 부문에 대해 부정적 인식이 갈수록 확산되는 것이다. 대표적 대상이 대기업이다.

대기업 문제점 과도하게 지적

사실 우리 대기업은 한국 경제의 성공적인 발전을 주도한 세계에 자랑할 만한 명품 중 명품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대기업은 우리 사회에서 애증이 교차하는 묘한 대상이다. 해외에서는 나라와 국민의 정체성과 자부심을 높여주는 대단한 자랑거리다. 미국이나 유럽의 고속도로를 달리는 한국산 자동차, 세계 주요 도시의 전광판에서 빛을 발하는 국산 전자제품 광고, 거대 컨테이너를 싣고 오대양을 누비는 우리 선박을 볼 때 한국인이라면 누구나 뿌듯함을 느낀다. 그런데 국내에만 들어오면 국내 경제의 모든 과실을 독식하는 탐욕의 상징이요, 감시와 경계가 필요한 무서운 괴물로 돌변한다. 정부 지원과 중소기업 등의 희생을 통해 대기업이 성장했다는 경제개발 초기 시대 논리가 여전히 우리 정치 사회에 자리 잡고 있는 것이다.

정부가 지원하고 중소기업이 희생만 하면 세계적인 대기업이 자동적으로 생겨난다면 한국 경제에 무슨 걱정이 있겠는가. 국내 대기업의 문제점을 과도하게 부각하여 무력화하기보다는 창의성과 역동성을 살려 한국 산업의 성장동력을 확보하고 이를 통해 고용과 세금을 늘리는 좀 더 합리적인 기업정책이 마련되어야 한다. 과도한 온정적 보호주의가 자리 잡아가고 있는 점도 우려된다. 소득 격차를 축소하고 내수를 살리는 많은 방안이 이런 생각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특히 영세 유통업체나 중소기업 고유 영역을 보호하고 지원하는 일 등에서 이 같은 불안감을 느낀다. 산업정책은 국민소득 수준이 향상된 점을 감안해야 한다. 평균 소득이 늘면 누구나 쾌적한 유통점에서 값싸고 질 좋은 제품을 구매하고 싶은 욕구가 증가한다. 영세 중소기업들이 공급하는 제품들 역시 안심하고 소비할 수 있는 여건이 조성되길 원한다. 진정 이 산업들의 성장과 소비자 잉여 증대를 원한다면 자본 투여 등으로 제품 경쟁력을 높이고 국제적 위상을 높이는 방안을 강구해야 할 것이다.

한국 경제의 앞날을 어둡게 하는 또 다른 패배주의 요소는 가장 생색내기 좋고 손쉬운 방안으로 경제적 과실을 공평하게 나누자는 공유주의가 힘을 얻고 있는 점이다. 경제 성과를 모든 참여자에게 공평하게 나눈다면 당장은 인기를 얻을지 모르나 경제 전체 활력은 그 순간부터 서서히 소멸되기 시작한다. 부가가치 기여별로 부를 분배하는 유인 제도를 마련하는 것이 분배를 강요하는 것보다 한국 경제를 튼튼하게 만드는 길이다. 한국 경제 성장을 이끄는 견인차 역할을 해야 하는 교육도 모든 사람이 평등해야 한다는 공유주의 성향에 부정적 영향을 받고 있다. 교육은 당연히 전 국민의 잠재적 능력을 계발하는 데 초점을 맞추어야 하지만 경쟁과 수월성을 배제할 수 없다. 장시간의 공부나 높은 등록금을 안쓰러워하는 것도 필요하지만 돈을 더 들여서라도 청소년들의 존재감과 성장 가능성을 높여줄 수 있는 교육 시스템을 만드는 데 더욱 신경을 써야 한다.

창의성 살려 성장동력 확보해야

명심해야 할 것은 죽고 사는 살벌한 세계 경쟁 속에서 행복을 누리려면 그만큼 수고와 노력을 더해야 한다는 점이다. 약자에 대한 지속가능한 온정과 보호를 위해서는 재정위기와 신용등급 하락으로 이 같은 능력이 약화된 미국 경제를 타산지석으로 삼아야 한다. 현실 변화를 감안하지 못하는 정책의 복고주의도 한국 경제를 퇴보시키는 요인으로 작용한다. 대·중소기업 상생과 같은 주요 정책들 중 대다수가 언젠가 한번쯤 보고 들었거나 논란의 대상이 되었던 것들이라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다. 한국이 누구나 풍요롭게 잘사는 선진경제국이 되려면 현실에 안주하려는 안일함과 사고의 빈곤을 극복해야 한다.

유병규 현대경제연구원 경제연구본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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