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는 불교 도교 등이 공존하는 다종교사회였다. ‘팔관회’는 고려 왕조가 여러 종교를 아우르기 위해 마련한 국가적 행사였다. 이날이 되면 고려 사람들은 종교와 상관없이 함께 등불을 밝히고 밤새 음악과 춤을 즐기면서 국가와 왕조의 태평을 기원했다. 팔관회에는 외국 사신들이 찾아왔으며 무역도 이뤄졌다는 기록이 나온다.
▷한국은 전통적으로 종교 갈등이 거의 없는 나라였다. 불교 등 토착 종교들이 외래 종교에 대해 그다지 거부감을 드러내지 않았던 이유가 컸다. 천주교의 경우 세계적으로 독특한 사례를 남겼다. 18세기 말 조선 사회는 자생적으로 천주교를 받아들인다. 중국을 통해 들여온 서양 서적을 공부하던 조선 선비들은 천주교의 존재를 알게 된다. 이들은 중국 베이징에 있는 천주교 성당에 미사를 주관할 신부를 보내달라고 요청했다. 한국인의 종교에 대한 유연성과 적극적인 자세를 엿볼 수 있다.
▷몇 해 전부터 우리 사회에 종교 간 갈등이 두드러져 우려스럽다. 기독교의 공격적인 포교 방식도 원인으로 작용했다. 기독교 신자인 이명박 대통령이 취임한 이후 종교 문제에 대한 미숙한 대처, 다른 종교들의 상대적 소외감도 영향을 미쳤다. 급기야 조계종은 지난해 12월 정부와 여당 인사들의 사찰 출입을 금지하는 조치를 내렸다. 템플스테이 지원 예산이 삭감된 것이 계기가 됐지만 누적된 섭섭한 감정이 깔려 있었다. 종교 갈등이 심해지고, 정부와 종교의 불편한 관계가 이어지는 현상은 한시바삐 바로잡아야 한다.
▷조계종이 먼저 손을 내밀었다. “우리 불교인은 이웃 종교를 진정으로 ‘이웃’으로 생각하는 데 충분하지 못했음을 반성합니다.” 조계종이 어제 발표한 ‘21세기 아쇼카 선언’의 초안에 담긴 내용이다. 아쇼카는 기원전 3세기 인도의 왕으로 이웃 종교를 존중할 것을 역설했다. 올해 4월 부활절에는 천주교 정진석 추기경이 “종교가 행복과 화해의 도구가 아니라 분열과 불행의 주체가 되는 것에 대해 반성해야 한다”며 화해를 강조했다. 기독교에서도 같은 목소리가 나온다. 타 종교에 관대한 우리 전통을 되찾아야 할 시점이다. 출발점은 각 종교 주체가 먼저 스스로를 돌아보는 일이 됐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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