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년 전 현대그룹에서 벌어진 ‘왕자의 난(亂)’의 승자는 정몽헌 회장(MH)이었다. 그는 2000년 3월 형인 정몽구 회장(MK)을 공동회장에서 밀어내고 부친인 정주영 창업주를 잇는 단독회장으로 올라섰다. 그해 9월 계열 분리한 MK의 현대자동차그룹 계열사는 10개였다. 반면 MH는 그룹의 모태인 현대건설을 비롯해 전자 상선 금융 등 26개사를 장악했다.
정몽구 정몽헌 명암 가른 북한 변수
그러나 MH의 영광은 짧았다. 정주영 정몽헌 부자(父子)가 채산성을 무시하고 밀어붙인 대북(對北) 사업이 발목을 잡았다. 총체적 전모가 아직 베일에 싸인 김대중-김정일 정상회담을 위해 현대가 부담한 거액의 뒷돈은 자금난을 가중시켰다. ‘정몽헌 현대’의 축인 현대건설과 현대전자가 채권단의 손에 넘어갔다. MH는 비극적 최후를 맞았다. 북한은 현대와 맺은 관광사업 독점권 계약을 파기했고 현대의 금강산 시설도 몰수했다.
리스크가 큰 대북 사업에 정주영이 왜 그렇게 집착했는지는 지금도 수수께끼다. 정말 사업성이 있다고 판단했든, 실향민의 감상적 판단이었든 ‘왕회장의 총기’와는 거리가 멀었다. 대북 유화정책을 편 김대중 정부와 손잡고 북한과 거래하면서, 경부고속도로 건설 등에서 단기적으로 손해를 보더라도 길게 보면 남는 장사를 했던 박정희 정부 시절의 기억을 떠올렸을 수도 있다. 하지만 우리 경제사에 큰 족적을 남긴 박정희와 정주영의 만남과 달리, 정주영 정몽헌 부자와 김정일의 잘못된 만남은 기업에도, 대한민국에도 재앙만 초래했다.
MK가 2000년 11월 ‘정주영 현대’의 상징인 서울 종로구 계동 사옥을 떠나 서초구 양재동 사옥으로 옮겼을 때 현대차의 미래는 밝지 않았다. 세계 자동차업체가 다섯 개밖에 살아남기 어렵다는 전망이 나오던 그 시절 현대차의 세계 순위는 11위였다. 당시 국내 재계 순위도 ‘정몽헌 현대’가 2위, ‘정몽구 현대차’가 5위였다.
지금 현대차그룹은 삼성에 이어 확고한 재계 2위다. 현대·기아차는 차량 판매대수에서 일본 도요타차와 세계 4위를 다툰다. 2006년 비자금 사건으로 곤욕을 치렀던 MK는 얼마 전 사재(私財) 5000억 원 규모의 사회 기부와, 1조1500억 원 규모의 협력업체 구매자금 선(先)지급 발표로 주가를 높였다. 그는 채권단에 넘어갔던 현대건설을 다시 인수한 뒤 올 4월 정주영의 집무실이었던 계동 사옥 15층으로 돌아왔다.
‘정몽구 현대차’의 급성장 원인으로 품질 경영과 현장 중시, 해외에서의 맞춤형 마케팅, 외국 경쟁업체들의 부진 등이 꼽힌다. 대북 사업과 철저하게 거리를 둔 MK의 소신과 뚝심도 간과할 수 없다. 김대중 노무현 정부 시절 현대차는 정권의 눈 밖에 나지 않기 위해 이런저런 ‘사탕’을 내놓았지만 북한에 투자하라는 압박에는 끝까지 버텼다. 만약 그때 현대차도 ‘북한 수렁’에 빠졌더라면 오늘의 글로벌 현대차는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정주영 패밀리 그룹 중 현대차와 마찬가지로 북한에는 눈도 돌리지 않았던 현대중공업과 현대백화점 역시 탄탄한 경영을 이어가고 있다.
곁눈 파는 경영자는 도태된다
기업 경영을 통일사업이나 자선사업 등으로 착각하면서 곁눈을 파는 것은 위험하다. 아무리 의도와 명분이 그럴싸해도 회사를 거덜 내고 임직원, 주주, 국민에게 부담을 떠넘긴다면 경영자로서 실패를 넘어 죄를 짓는 일이다. ‘정주영 현대’에 함께 입사한 임직원이라도 그룹이 나눠진 뒤 지금 어디에서 일하느냐에 따라 자부심과 사기, 심지어 표정까지 달라진 모습을 심심찮게 발견할 수 있다.
남북 경제협력이 제대로만 이뤄지면 우리 기업의 새로운 돌파구가 될 수 있다. 북한 주민의 삶을 끌어올리는데도 도움이 될 것이다. 하지만 긍정적 효과가 나타나려면 먼저 북한 김정일 집단의 행태가 확연히 달라져야 한다. 현대가(家) 성공과 실패의 궤적은 두고두고 교훈으로 남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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