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용식 체육과학연구원 박사(체육행정)는 대구 세계육상선수권대회가 끝난 뒤 대한육상경기연맹 관계자로부터 “육상 발전 중장기 프로젝트를 다시 만들어 달라”는 전화를 받았다. 이 박사는 “그럴 생각이 전혀 없다”며 끊었다.
이유는 이렇다. 이 박사는 대구가 세계육상선수권대회를 유치한 2007년 문화체육관광부의 주도로 육상연맹과 함께 육상 발전 중장기 프로젝트를 진행했다. 그런데 2008년 12월 대학교수와 육상인들이 개최한 한국육상발전대책위원회에 발제자로 나서자 육상연맹은 “우리와 일하기 힘들다”며 이 박사를 제외했다. 이 박사는 “한국 육상 발전을 위해 방법을 찾겠다는데 육상연맹이 못하게 하는 게 말이 안 된다”고 당시를 회상했다.
2년 넘게 이 박사를 찾지 않다가 다시 찾은 이유는 문화부가 2009년부터 매년 약 30억 원씩 지원하던 기금에 대해 실효성 평가를 하겠다고 해서다. 그럴듯한 장단기 프로젝트를 만들어 기금을 계속 받아내기 위해 ‘눈엣가시’였던 이 박사가 필요했던 것이다. 이 박사는 “2007년에 2016년까지 장기 계획을 만들어줬다. 그런데 연맹은 문화부가 준 돈도 제대로 쓰지 못하고 돌려주기도 했다. 참 한심한 조직이다”고 한탄했다.
대구 세계선수권이 끝난 뒤 한 개의 메달도 획득하지 못한 한국 육상에 대해 비판의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비판의 주요 표적은 육상연맹이다. 1997년 삼성이 연맹을 맡은 뒤 한국 육상계는 둘로 나뉘었다. 연맹이 말 잘 듣는 육상인들만 등용하고 비판적인 인사는 철저하게 배제해 왔기 때문이다. 연맹 내에서도 옳은 말 하는 사람은 바로 잘렸다. 지난해 국제육상경기연맹(IAAF)을 10년 넘게 담당했던 이모 과장도 사표를 냈는데 ‘바른말 해 윗분 눈치 보다가 나갔다’는 게 정설이다. 철저하게 ‘딸랑이’ 역할을 해야만 살아남는다.
이런 일방통행식 운영은 한국 육상을 퇴보시키고 있다. 1992년 바르셀로나 올림픽 남자 마라톤에서 황영조가 금메달을 획득하고 1996년 애틀랜타 올림픽에서 이봉주가 은메달을 딴 이후 한국은 올림픽이나 세계선수권에서 한 개의 메달도 따지 못했다. 대구 대회를 맞아 육상대표팀을 지원했던 한 체육과학연구원 박사는 “육상을 잘 모르면서 자기들 방식으로만 일하는 삼성 인사들이 빠져야 육상이 제대로 굴러갈 것”이라고 말했다.
육상인들은 세계 3대 스포츠 행사의 하나인 세계육상선수권대회 개최를 계기로 한국 육상이 재도약하기를 바랐다. 하지만 단기는 물론이고 장기 비전 하나 제대로 만들지 못하는 육상연맹의 무능한 행정으로 이 좋은 기회를 날리게 될 것 같아 안타까워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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