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무총리는 대한민국 헌법 86조에 ‘대통령을 보좌하며 행정에 관하여 대통령의 명을 받아 행정각부를 통할한다’고 명시된 헌법기관으로 대통령에 이어 행정부 서열 2위다. 작년 10월 취임한 김황식 총리는 조용하면서도 상식에 맞는 언행과 무난한 업무 수행으로 신망을 쌓아가고 있다.
김 총리를 10·26 서울시장 보궐선거 후보로 징발하려는 움직임이 한나라당 일각에서 나타나고 있다. 안철수 돌풍이 야권(野圈)의 박원순 지지로 연결되는 상황에서 김 총리가 한나라당의 구원투수로 나서야 한다는 목소리가 서울지역 의원들을 중심으로 나오는 것이다. 호남 출신인 김 총리는 대법관 감사원장을 지낸 무게까지 겸비해 야권의 바람몰이에 맞설 수 있는 몇 안 되는 인물이라는 게 여권 내 평가다.
그러나 헌법기관인 국무총리를 서울시장 선거전에 끌어들이려는 것은 눈앞의 선거 승리에만 집착하는 정략적 행태로 정치의 대도(大道)가 아니다. 1995년 지방자치단체장 선거가 실시된 이래 고건 정원식 한명숙 등 전직 총리가 서울시장 선거에 출마한 적은 있지만 현직 총리 차출은 전례가 없다. 감사원장을 하다 임기 4년을 절반가량 채우고 국무총리가 됐는데 11개월 만에 다시 서울시장에 나가라는 것은 너무 심한 ‘돌려 막기’다.
2007년 12월 대통령선거와 2008년 4월 총선에서 국민은 한나라당에 힘을 실어 줬다. 한나라당과 친여 정파는 국회 의석의 60% 안팎을 차지하고 있다. 이런 거대 여당이 현직 총리에게 ‘후보 품앗이’를 요구하는 지경에 이르렀으니 처지가 딱하다. 거대 여당에 거목은 없고 도토리만 즐비한 인상을 준다. 집권 여당으로서 꾸준히 인물을 모으고 키우려는 노력이 없어 이 모양이 된 것이다. 권력의 밥그릇을 놓고 아귀다툼이나 벌이면서 제 살길만 찾는 물에서 번듯한 인물이 나기를 기대할 수도 없다.
한나라당 소장파와 친박(親朴)계 인사들이 김 총리 차출에 앞장서는 의도도 의심을 받고 있다. 한나라당 소속 의원 중에 서울시장 예비후보로 가장 강세를 보이고 있는 나경원 최고위원을 견제하려는 뜻이 숨어 있다는 해석이다. 특히 친박 진영은 여성인 나 최고위원이 서울시장이 되면 박근혜 전 대표의 대선 가도에 부담이 될 수 있다는 우려 때문에 나 의원을 배제하려 한다는 관측을 낳고 있다. 시장선거건, 대선이건 한나라당이 하나로 똘똘 뭉쳐도 될까 말까 한 판에 이리 찢기고 저리 갈리면 민심이 더 멀어질 수밖에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