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바이벌 오디션 프로그램은 볼수록 선거 과정과 닮았다. 투표로 상위 진출자를 가리는 점이 그렇고, 단계를 거듭하며 약자를 떨어뜨려 나가는 점도 그렇다.
추석 연휴에 여러 지상파와 케이블 채널이 국내외 서바이벌 오디션 프로그램을 풍성히 방영했다. 그 덕택에 지난 추억도 떠올릴 수 있었다. 2008년, 영국 연수 중이던 기자의 가족은 서바이벌 오디션 프로그램 ‘X팩터’를 빼놓지 않고 보았는데 당시 결선에 올랐던 ‘걸밴드’ 멤버 티타가 한류 오디션 유럽예선에 뽑혀 MBC ‘위대한 탄생 2’에 등장한 것이다. 반가웠다.
그 시즌 X팩터는 출연자들의 남다른 ‘스토리’로 많은 화제를 낳았다. 10대에 엄마가 되어 아이들을 기르느라 잃은 청춘을 되찾겠다는 레이철, 사별한 아내가 ‘당신의 꿈을 이루라’고 했던 말을 떠올리고 출연하게 됐다는 대니얼의 이야기가 시청자들의 심금을 울렸고 이들은 승승장구하며 결선에 진입했다. 그러나 그때쯤 여러 신문이 ‘오디션에 개인 히스토리가 너무 많다’ ‘인생유전 이야기엔 질렸다’며 비판적 기사들을 쏟아놓기 시작했다. 그 뒤 이들의 승전보는 멈췄다.
X팩터 2008년 시즌은 그렇게 마무리됐지만 서바이벌 오디션이 출연자의 남다른 사연을 강조하다 자기 함정에 빠진 사례는 많다. 2007년 영국 ‘브리튼스 갓 탤런트’에서 슈퍼스타가 된 폴 포츠는 ‘전화 외판원 출신 테너’로 화제를 모았지만 성악 레슨을 받았다는 사실이 알려져 여론의 도마에 올랐다. 한국에선 보육원에서 자라 껌팔이 생활까지 경험했다는 tvN ‘코리아 갓 탤런트’ 출연자 최성봉 씨가 예술고에 다녔던 사실이 방송에 나오지 않아 비판을 받았다.
왜 사실을 숨기면서까지 남다른 스토리 만들기에 힘을 쏟을까. 투표는 이성적인 행위이면서 감성적인 행위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멋진 노래도 중요하지만 내 마음을 움직이려면 그 사람의 ‘이야기’가 나를 움직이는 것도 중요하다.
오디션 프로그램이 뜨는 현실과 관련이 있을까. 우리의 정치과정에도 ‘감성적 스토리텔링’의 비중이 높아지고 있다. 자리를 건 투표에 나서면서 눈물을 보이고, 산에서 방금 내려온 텁수룩한 수염의 후보자가 어제까지 넷심을 뒤흔들어 놓았던 경쟁자를 부둥켜안는다. 후보자의 너덜너덜한 신발이 사진작가의 카메라에 잡히면 몇 시간 내 트위터를 타고 전파된다.
정보가 실시간 전파되는 스마트 세대의 특징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대중이 새로운 얼굴과의 감성적 소통을 갈망하는 것은, 정치권이 소통을 모르고 역지사지와는 담을 쌓으며 집단이기주의에 함몰된 듯한 모습을 보이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러나 주의해야 한다. 오디션 프로그램과 선거는 다르다. 가수를 잘못 뽑았을 때의 불이익은 설익은 노래를 듣는 데 그친다. 국회의원을, 시장을, 대통령을 잘못 뽑았을 때의 불이익은 더욱 현실적이고 직접적이다. 서바이벌 오디션에서는 최소한 노래를 들어본 뒤 투표한다. 선거에서는 후보의 참된 실력을 알지 못한 채 투표하고, 그 결과가 몇 년이나 사회에 부담이 될 수 있다.
지금 우리는 어느 때보다 감동을 주는 지도자를 원한다. 단, 국민의 일꾼을 뽑는 일에는 냉철한 이성도 필요하다. 당장 감동의 이미지를 주는 인물에게 열광할 것이 아니라, 임기가 끝날 때까지 감동의 총량을 크게 안겨줄 사람이 누구인지 차가운 머리로 결정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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