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차 세계대전 종전 후 첫 총리 선거결과가 발표되던 1945년 7월 26일 윈스턴 처칠은 경악했다. “아니 영국 국민이 그 어려운 전쟁을 승리로 이끈 나를 버리다니!” 처칠은 ‘요람에서 무덤까지’라는 푸짐한 복지구호를 내건 노동당의 클레멘트 애틀리에게 참패한 것이다. 전쟁에 지친 국민은 땀과 눈물을 요구하는 처칠 대신 달콤한 애틀리를 선택했다.
35년의 세월이 흐른 뒤 노조를 등에 업고 총리직에 도전한 제임스 캘러헌은 자신만만했다. 1970년대 극심한 노사대립에서 영국 국민은 항상 노조의 손을 들어줘 노조는 보수당 출신 총리를 갈아 치워 버릴 정도로 무소불위였다. 그런데 어처구니없게도 구멍가게 집의 딸 마거릿 대처에게 패했다. 달콤한 복지와 노동자 천국이 가져올 영국병의 심각함을 알아차린 국민이 ‘강력한 영국의 재건’을 내세운 대처를 선택한 것이다. 대영제국은 무너졌지만 국민이 역사적 소명을 다할 수 있는 지도자를 시대의 흐름에 따라 현명히 선택했기에 영국은 아직도 G7 대열에 끼여 있다.
이제 눈을 우리에게로 돌려 보자. 우리 대통령들도 크고 작은 과오는 있었지만 나름대로 시대적 상황에 부응한 역사적 소명은 했다. 이승만 대통령은 휴전 후 한반도에서 적당히 발을 빼려는 미국을 한미동맹의 틀 속에 엮어 넣었고, 박정희 대통령은 한강의 기적을 일으켰고, 김영삼 대통령은 군사정권의 잔재를 일소했다. 그랬기에 경제발전과 민주화라는 두 마리 토끼를 잡고 세계 10위권의 나라로 도약할 수 있었다.
달콤함과 피땀 사이의 국민선택
15개월 뒤로 다가온 대선의 열기가 벌써부터 달아오르고 있다. 차기 대통령이 집권할 2013년부터 2018년까지의 시대상황은 어떻고 이에 따른 역사적 소명은 무엇일까. 가장 먼저 떠오르는 시대상황은 통일이다. 통일은 북한정권이 붕괴된다고 저절로 찾아오진 않는다. 이미 한반도 통일에는 중국 일본 미국 등의 이해관계가 복잡하게 얽혀 있다. 독일 통일에서 보듯 중국이나 일본 같은 주변국은 한반도가 하나가 되는 걸 좋아하지 않을지 모른다. 비스마르크도 통일을 결사반대하던 나폴레옹 3세와 일전을 치렀고, 서독의 헬무트 콜 총리도 뛰어난 외교력으로 미국과 손잡고 통독을 반대하던 영국 프랑스 소련을 설득해야 했다.
다음은 선진화다. 2018년이면 완전한 노령화사회에 들어가 절대인구가 줄고 잠재성장률이 1%대로 떨어진다. 따라서 차기 대통령 집권 기간에 선진경제의 기반을 마련하지 못하면 선진국의 꿈은 영원히 접어야 한다.
마지막으로 국민 통합이다. 좌우 이념대립에서 빈부 갈등 등 그간 우리 사회에 깊게 파인 온갖 갈등의 골이 더욱 깊어질 것이다. 차기 지도자가 이런 갈등을 잘 통합하지 못하면 선진화는커녕 한때 잘나가다 갈등 때문에 폭삭 망해버린 필리핀 꼴이 될지도 모른다.
통일, 선진화, 국민 통합이라는 세 가지 역사적 소명을 다할 수 있는 차기 대통령의 덕목은 무엇일까. 우선 국제정세를 꿰뚫어보며 군(軍)을 다룰 줄 아는 비스마르크형 지도자의 덕목이다. 남북통일을 둘러싸고 미묘하게 얽혀 있는 주변국들의 이해관계, 특히 중국의 속내를 손바닥에 놓고 비스마르크처럼 재치 있게 ‘요리’할 수 있어야 한다. 또한 통일과정에서 군사적 긴장사태가 생기더라도 전쟁공포에 휘말리지 않고 최고통수권자로서 군을 잘 통솔해 평화적으로 상대를 제압할 수 있는 배짱도 있어야 한다.
두 번째는 온갖 달콤한 공짜 복지 보따리를 풀어놓으려는 수많은 ‘사이비 산타클로스’와 의연히 맞서 재정건전성을 유지하고 자유기업과 시장경제의 뿌리를 이 땅에 굳게 내릴 대처형 지도자의 덕목이다.
마지막으로 각기 다른 목소리를 내는 다양한 이해집단을 노련한 양치기처럼 잘 이끌어갈 수 있는 로널드 레이건 미국 대통령 같은 소통의 달인이어야 한다. 우리가 갈등사회에 들어선 이상 아무리 좋은 정책을 펼치더라도 반대의 목소리가 클 것이다. 청와대 안에서 일만 열심히 하는 지도자는 안 된다. 밖으로 나와 다양한 사람들과 소통하고, 레이건처럼 때로는 정적과도 술잔을 기울이며 국사를 논할 줄 알아야 한다.
통일·선진화·국민통합 이끌 인물
박근혜, 안철수, 문재인, 김문수, 손학규 등등 이름이 오르내리는 잠재후보들은 과연 차기 정부의 시대적 상황을 정확히 이해하고 비스마르크, 대처, 그리고 레이건 같은 덕목을 가지고 역사적 사명을 다할 수 있을까.
지금부터 검증해봐야 알 일이다. 다만 이들에게 부탁하고 싶은 한마디가 있다면 차기 대통령의 험하고 어려운 역사적 사명을 진지하게 고민해 보고, ‘나는 아니다’ 싶으면 지금이라도 깨끗이 꿈을 접으시라. 그것이 진정 나라와 국민을 위한 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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