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자란 곳은 전기가 들어오지 않는 시골 마을이었습니다. 그곳에서 세 오빠와 어울려 지내면서 오빠들이 빌려온 책을 읽기 시작했습니다. 세 살 위 오빠가 안데르센 동화집을 빌려왔을 때 먼저 읽고 싶어 비밀스러운 장소를 찾아야 했습니다. 닭과 돼지가 있는 헛간에 들어가 볏짚에 엎드려 책을 읽기 시작했죠. 돼지가 꿀꿀, 닭이 꼬꼬댁거리는 소리를 들으며 ‘인어공주’를 다 읽었을 때 많이 슬펐습니다. 오빠가 찾지 못하게 조용히 있어야 하는데 그만 큰소리로 울었습니다. 이곳 말고 다른 곳에선 이렇게 아름답고 슬픈 이야기가 있구나…. 그 헛간에서 책을 읽고 울음을 터뜨리면서 열한 살 소녀는 조금 어른이 됐다고 생각합니다.”
책은 신세계로 이끄는 마법의 양탄자
10일 호주 브리즈번의 퀸즐랜드주립도서관 강당을 채운 파란 눈의 청중 200여 명은 연단에 선 동양 여인의 낯선 언어를 한마디라도 놓칠세라 숨죽인 채 경청했다. 가만가만 나지막이 말하는 목소리엔 당당한 자신감이 스며있었다. 책을 통해 그가 눈부신 신세계와 조우한 순간을 통역이 전했을 때 길고 긴 박수가 이어졌다. 그는 ‘엄마를 부탁해’의 작가, 신경숙이었다.
‘한국의 살아있는 국보’로 소개된 신 씨는 ‘왜 책을 읽는가’란 주제로 진행된 행사에서 호주에서 존경받는 작가 케이트 그렌빌, 미국의 인기작가 아니타 슈레브와 함께 패널로 참석해 삶에서 책읽기가 갖는 의미를 진솔하게 들려주었다. 새 책을 사면 살아있는 존재처럼 냄새부터 맡는다는 신 씨의 고백에 공감의 폭소가 터졌다. 세상에 할 일도 숱하게 많은데 굳이 책을 읽는 이유는 무엇인가. 독서야말로 세상을 보고 듣고 느끼고 생각하는 수만 가지 일을 하는 길이기 때문이라고 그렌빌 씨가 말하자 객석은 뜨거운 박수로 동감을 표시했다.
49년 역사를 지닌 ‘브리즈번 작가 페스티벌’(7∼11일)을 지켜보며 새삼 읽기의 매혹을 되새기게 됐다. 개막 연설을 맡은 저명한 미국작가 앤 패쳇의 독서론은 인상적이었다. 문학은 작가 자신에 대한 이야기이자 동시에 타인에 대한 이야기다. 문학작품은 우리가 모르는 세상을 나의 세계로 성찰하고, 만나보지도 못한 사람들의 역경에 연민을 느끼게 하는 힘을 갖는다. 따라서 읽는다는 것은 개인적 행위뿐 아니라, 인간 공동체의 일원이라는 소속감을 유지하는 작은 연대감의 체험이 된다는 얘기였다.
깊이 사유하는 힘과 인간의 품격은 뗄 수 없는 관계다. 책은 우리를 새로운 세상으로 데려가는 마법의 양탄자이자 정처 없는 삶에서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준다. 공중으로 사라진 인어공주의 아픔에 절실하게 공감한 시골소녀는 그 생생한 증거다. 이제 소녀는 어디론가 사라진 어머니의 슬픔을 세계인과 공유하는 소설을 통해 자신만의 글을 쓰는 국제적 작가로 우뚝 섰다. 행사를 마친 뒤 공동사인회에는 신 작가의 사인을 받기 위한 줄이 가장 길었다. 멋쟁이 호주 할머니는 생일을 맞은 자기 자신을 위한 선물이라며, 어느 교민은 호주 친구에게 꼭 권하고 싶은 책이라며 책을 내밀었다.
인터넷 접속 늘며 책과 점점 멀어져
인터넷 접속 시간이 길어지고 TV의 자극적 이미지에 중독되면서 사람과 책 사이가 자꾸 멀어져간다. “시인이 못된 내게 남아있는 건 좋은 시를 읽는 기쁨”이라고 말하는 소설가 신 씨가 예전에 동아일보를 통해 독자들과 공유했던 작품 중 하나를 꺼내 읽어본다.
‘사람 하나 만나고 싶다/생각이 무슨 솔굉이처럼 뭉쳐/팍팍한 사람 말고/해질 무렵/도랑에 휘휘 손 씻고/쉰내 나는 보리밥 한 사발/찬물에 말아 나눌/낯모를 순한 사람/그런 사람 하나쯤 만나고 싶다.’(박찬의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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