꼭 10년 전인 2001년 9월 17일. 당시 이석연 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경실련) 사무총장과 박원순 참여연대 사무처장은 서울 세종문화회관에서 격렬한 논쟁을 벌였다. 시민운동이 싹 튼 지 10년이 흐른 뒤였다. 한 해 전인 2000년 16대 총선을 앞두고 낙천낙선운동이 벌어졌고 이를 둘러싸고 경실련과 참여연대가 대립했다.
이석연은 “시민단체의 직접적 정치참여는 시민운동의 본질을 벗어나는 것”이라고 비판했고 박원순은 “(참여연대가) 정치세력과 유착됐다는 주장은 근거가 없다”고 반박했다. 이석연은 낙천낙선운동에 대해서도 “법의 테두리를 벗어난 시민운동은 있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한 반면 박원순은 “당대에 불법이었던 운동이 후대에 합법화될 수 있다”고 맞받았다.
법 중시와 법 경시, 우파성과 좌파성
세상은 알 수 없는 것이다. 안철수 돌풍이 박원순 변호사(55)를 들어올려 서울시장 후보 선두자리에 앉혀놓더니 이번에는 이석연 전 법제처장(57)이 대항마로서 출마 의지를 밝혔다. 10년 전 정치참여를 놓고 공방을 벌이던 두 사람이 함께 정치에 뛰어든 것이다. 둘 다 현재로선 정당 입당을 꺼리고 있지만 박원순의 민주당, 이석연의 한나라당 친화성은 누가 봐도 분명하다.
두 살 차이인 두 사람은 비슷한 시기에 시민운동단체에 둥지를 틀었다. 이석연은 1994년 경실련에, 박원순은 1995년 참여연대에 들어갔다. 이석연은 1989년 생긴 경실련에 뒤늦게, 박원순은 사실상 참여연대 창립 회원으로 들어갔다. 경실련의 영문 이름은 Citizen's Coalition이고 참여연대는 People's Solidarity이다. 박원순은 “Citizen보다는 People로 써서 민중적 관점을 더 드러내려 했다”고 어느 책에 쓴 적이 있다. 두 사람의 맞수 관계는 이미 그때부터 시작됐다.
앞서 질풍노도의 1980년대를 이석연은 법률 분야 공직자로, 박원순은 인권변호사로 보냈다. 이석연은 전북대 법학과를 졸업한 후 1979년 행정고시, 1985년 사법시험에 합격했고 1994년 변호사로 개업하기까지 약 15년간 법제관과 헌법연구관으로 일했다. 시위로 서울대를 중퇴한 박원순은 1979년 단국대 사학과를 졸업한 뒤 법원 일반직 시험을 거쳐 등기소장으로 근무하다 1980년 사시에 합격했고, 1981년 검사를 잠깐 하다가 1982년 변호사로 개업해 시국사범 변호를 많이 했다.
노무현 집권 이후 이석연과 박원순은 색깔을 분명히 했다. 박원순은 아름다운가게 등 새 활동을 시작하면서 이른바 진보진영과의 연대에 힘썼고, 이석연은 행정수도 이전 위헌소송을 주도했고 이명박 정부 초대 법제처장을 맡았다.
시민운동의 피날레 보여주는 그들
한국의 시민운동은 1987년 민주화 이후 민주 대 반(反)민주로 진영을 나누는 민주화운동이 호소력을 갖지 못하고, 1990년 옛 소련의 붕괴 이후 계급 중심의 민중운동이 힘을 잃은 상황에서 새로운 사회운동으로 등장했다. 초창기 시민운동은 국민의 높은 지지를 받았다. 언론도 학계도 힘을 실어줬다. 그러나 김대중 노무현 정부를 지나면서 시민운동단체와 정권의 칸막이가 무너졌고 시민운동의 공정성과 중립성이 의심받기 시작했다. 참여연대 등 여러 시민단체들은 더 젊은 세대가 조직을 장악하면서 과격해지고 좌경화했다. 시민운동 내의 이념적 분화가 일어나고 바른사회시민회의 같은 뉴라이트(신우파) 성향의 시민운동 단체도 생겼다.
한국의 정치는 원내에서는 정당끼리, 원외에서는 시민운동단체끼리 판박이 하듯 대립한다. 어떤 시민운동단체의 책임자들은 사실상 장외(場外) 정치인이나 다름없다. 이것이 오늘날 시민운동의 현실이다. 이석연과 박원순이 인물로서야 기존 정치인보다 신선해 보일 수 있지만 그 약발은 딱 한 번이다. 이들의 정치참여는 이미 파탄 난 시민운동의 피날레와 같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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