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예고는 내가 음악가로 성장하는 토대를 마련해준 곳이다. 음악생도들과 나눈 대화, 미술과 학생의 그림으로 가득 찬 복도, 오케스트라 연주를 배경으로 펼쳐지는 무용과 학생들의 ‘백조의 호수’ 공연…. 지휘과가 없어 작곡과로 들어간지라 지휘를 배울 수는 없었지만 학교의 예술적 환경은 사춘기의 예민한 감수성을 넉넉하게 채워주었다.
1960년대 AFKN의 ‘레너드 번스타인’ 청소년음악회를 본 후 지휘자가 되기로 마음먹었다. 지휘자 번스타인이 뉴욕필하모닉과 함께하는 청소년음악회는 나뿐 아니라 세계의 젊은이들에게 많은 영향을 주었다.
베를린에서 본격적으로 지휘를 공부하면서 ‘베를린필하모닉’이라는 멘토를 만나게 되었다. 세계 최고라는 자부심과 전통, 무엇보다 지휘자 카라얀과 함께하는 그들의 연주는 뜨거운 용암을 내뿜는 화산처럼 내게 큰 충격과 감동을 주었다. 카라얀 콩쿠르에 입상한 뒤 카라얀의 오케스트라 지휘 리허설 과정을 지켜볼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다. 넘치는 통솔력, 강렬한 카리스마, 빛나는 눈빛….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소중한 경험이었다.
콩쿠르에 입상한 뒤 심사위원장이었던 베를린필하모닉의 총감독 스테레제만 박사와 만나게 됐다. ‘세계적인 지휘자가 되는 데 도움이 될 만한 조언을 해주겠지’ 하고 기대했으나 그는 전혀 다른 얘기를 했다. “지금은 동양의 작은 나라에 지나지 않지만 한국은 곧 발전하는 나라가 될 것이다. 당신이 그 발전에 한 역할을 담당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한다.” 기대했던 것과 전혀 다른 얘기여서 실망했던 게 사실이다. 그러나 훗날 한국에 돌아와 KBS교향악단을 이끌면서 나는 깨닫게 되었다. 전국을 돌며 클래식을 전파하고 청소년음악회를 진행하며 미래의 청중을 만나는 것이, 그가 얘기한 ‘사회를 변화시키는 나의 역할’이라는 것을. 나도 모르게 또 하나의 멘토를 갖게 된 것이다.
나는 ‘오케스트라를 변화시키는 지휘자가 되어야겠다’고 다짐해 왔다. 그런 정신 뒤에는 1970년대 베를린음대에서 만난 라벤슈타인 교수가 있다. 학교를 통해 전화번호를 얻어 그에게 전화하자 그는 일면식도 없는 동양의 지휘자 지망생을 집으로 초대했다. 지휘 선생님도 없고 정식으로 지휘 수업도 받지 못한 사정을 얘기하고 간단한 테스트를 받았다. “넌 이미 늦었지만, 다시 돌아가서 유학을 준비하려면 더 늦어질 것이다. 나 같으면 오늘부터 이곳에 머물며 입학 준비를 할 것”이라면서, 학교에 들어오면 지도해 주겠다고 했다. 나는 단수여권을 소지한 여행자 신분이었지만 그게 위법이라는 사실도 느끼지 못했다. 그만큼 그의 제안은 구원의 손길로 다가왔다. 첫 입학시험에 통과하지 못해 좌절하던 내게 그는 말했다. “훗날 훌륭한 사람이 되었을 때 아무도 너의 오늘에 대해 관심을 가지고 있지 않을 것이다.” 그 말은 큰 용기가 되었다.
교실에 가면 그는 “구텐 모르겐, 헤어 금(굿모닝 미스터 금)”이라고 외치며 악수로 맞아주었다. 자신보다 한참 어린 학생이지만 이름 대신 성(姓)을 부름으로써 미래의 지휘자인 학생에 대한 존중을 표현했다. 학기가 끝나면 학생들을 집으로 불러 저녁을 함께했다. 식사 후 시가 박스를 들고 나와 학생들에게 한 개비씩 권하며 이야기를 나누는 모습이 처음엔 낯설게 느껴졌다. 그러나 같은 길을 걸어가는 동료로, 친구로 학생을 대하는 모습을 통해 리더의 의미를 깨닫게 됐다.
베를린에서 공부한 6년 동안 그에게 레슨비를 낸 적이 없다. 요즘 비싼 대학 등록금이 사회 문제가 되고 있다는 뉴스를 접할 때마다 베를린 시절이 떠오르곤 한다. 독일 사람에게만이 아니라 이방인에게도 배움의 기회를 준 사회! 그곳에서 배운 지식을 통해 고국의 발전에 큰 역할을 했다는 데 고마움을 느낀다. 배움에 목마른 젊은이들이 마음껏 뜻을 펼칠 수 있도록 우리 사회에도 변화의 바람이 일어나길 기대한다.
나는 라벤슈타인 교수가 그랬던 것처럼 나를 찾아온 이들의 연주를 기꺼이 들어주고 그들이 연주할 수 있는 무대를 마련하기 위해 노력해 왔다. 이것이 멘토의 가르침에 보답하는 길이 아닐까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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