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투에서 전세가 불리할 때 흔히 쓰는 전법이 ‘배수(背水)의 진(陣)’이다. 의미 그대로 물(강이나 호수)을 뒤에 두고 진을 치는 것만이 아니라 높은 절벽을 뒤에 두고 진을 치거나, 타고 온 배 또는 건너온 다리를 불태워 버리는 것도 배수의 진에 해당한다. 자기 진영의 병사들에게 사즉생(死則生)의 결의를 갖게 하려는 의도도 있지만 상대방 진영을 압박해 전의를 꺾으려는 목적도 담긴 일종의 심리전이다.
▷정치에서 가장 흔하게 이용되는 배수진은 직(職)을 거는 것이다. 1979년 김영삼 총재가 제명됐을 때 신민당 의원 66명은 항의의 표시로 집단 사퇴서를 제출했다. 1990년 3당 합당 때는 평민당과 민주당 의원 79명이 사퇴서를 냈다. 물론 두 경우 모두 사퇴서가 수리되지는 않았다. 노무현 정권 초기인 2003년에는 한나라당과 열린우리당이 실행에 옮기진 않았지만 각기 다른 이유로 의원 총사퇴를 선언한 적이 있다. 오세훈 전 서울시장이 무상급식 주민투표와 관련해 차기 대선 불출마를 선언하고 시장 직을 건 것도 배수진의 승부수였다.
▷천정배 민주당 의원은 18대 국회 들어 두 번 의원직을 던졌다. 2010년 1월 미디어법의 국회 본회의 처리에 항의해 정세균 최문순 장세환 의원과 함께 의원직을 던졌다가 170여 일 후 슬며시 돌려받았다. 지난달에는 서울시장 출마 의사를 밝히면서 의원직 사퇴와 함께 내년 총선에서 현 지역구(경기 안산 단원갑)에 출마하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이달 1일 국회 사무처에 사퇴서를 냈으나 아직 처리되지는 않았다. 국회가 개회 중이라 본회의 의결을 거쳐야 사퇴서 처리가 가능하다.
▷천 의원은 ‘고집’대로 하려고 하는데 손학규 민주당 대표가 만류하고 있다고 한다. 손 대표 자신이 승부수라면 남다른 이력이 있다. 그는 대권 도전 야망을 이루기 위해 14년간 자신을 키워준 한나라당을 버렸고, 2007년 대통합민주신당 대선 후보 경선 때 48시간 잠적 소동을 벌인 적이 있다. 그래서 천 의원의 심정을 잘 이해하는 것일까. 천 의원의 사퇴서 제출은 형식상의 배수진에 불과할 뿐 실제 처리되지 않으리라는 계산이 깔렸는지 모른다. 일종의 배수진 쇼를 두고 손 대표가 말리니 모양이 이상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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