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에서/조성하]이름은 스스로 빛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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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1년 10월 3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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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성하 여행전문기자
조성하 여행전문기자
“많은 사람이 자선을 행합니다. 하지만 모두가 제 명판(名板)을 세우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외면합니다. 자신의 진정이 ‘매명(買名)’으로 오해받는 것을 피해섭니다. 제겐 듬직한 다섯 아들이 있습니다. 제가 그 애들에게 가르치는 건 민주주의에 대한 지식, 타인의 권리에 대한 존중의식입니다. 당신이 제게 했던 것처럼 말이지요. 저는 확신합니다. 그걸 체득한 이 아이들이야말로 제 집안의 존재 이유라는 것을요. 그렇지 못하다면 제 이름은 기억될 이유가 없습니다. 제 스스로 그 이름을 묻어야지요.”

1908년 1월 미국 캘리포니아 주의 윌리엄 켄트 의원이 루스벨트 대통령에게 보낸 편지 일부다. 자신이 기증한 산과 숲을 ‘국가기념물’(National Monument)로 지정하려는데 거기에 ‘켄트’라는 성(姓)을 붙여도 될지를 묻는 대통령 편지에 대한 답장이었다. 며칠 후 대통령의 답신이 도착했다. “당신이 옳아요. 자기 자선에 명판을 붙이지 않으려는 자세가. 당신과 아들들이 ‘켄트’라는 성을 지키기 위해 노력하는 것 역시 훌륭합니다. 나도 아들이 넷인데 그 애들도 ‘루스벨트’라는 성을 지키기 위해 똑같이 노력할 겁니다.”

한 세기 전 오간 이 편지. 두 정치인의 진정성이 진하게 와 닿는다. 민주주의와 인권은 국가 최고의 가치이자 지식인의 존재 이유다. 그걸 자식 교육의 지고지선으로 삼은 대통령과 의원의 담론이 지금의 미국을 있게 한 덕목 같아 인상적이었다. 그러나 이보다 더 부러운 게 있다. 두 사람의 편지 속에 완곡하게 드러난 ‘명성(名聲)’에 대한 이해다. 이름이란 게 공동선을 위해 노력할 때 스스로 빛나는 것이지 자선행위 앞에 명판을 세운다고 알려지는 게 아니라는 것이다. 이름을 더럽힐 행동에 주저 않는 우리 정치권과 비교되는 대목이다.

편지가 오가게 된 배경을 알면 감동은 좀 더 커진다. 이슈는 켄트 의원이 기증한 레드우드 협곡의 산과 숲이다. 협곡은 북미대륙에 마지막 남은 세쿼이아 소나무 군락(226ha). 1억5000만 년 전만 해도 북미대륙 전체를 뒤덮었지만 당시는 남벌로 캘리포니아 서부 해안에 좁은 띠를 이루며 남아 있었다. 그는 보호하겠다는 생각에 이 땅을 상수도회사로부터 거금 4만5000달러에 사들인다. 1907년 상수도회사는 댐 건설 계획을 발표한다. 댐 완공 시 협곡은 수몰될 운명. 켄트 의원은 반대투쟁을 개시했고 상수도회사는 그를 법정으로 몰고 간다. 이때 켄트 의원이 묘안을 낸다. 이 땅을 연방정부에 기증한 것. 국가기념물로 보호받도록 하는 우회전략이었다.

켄트 의원은 대통령에게 보낸 답장에 사진 몇 장을 동봉했다. 존 뮈어(1838∼1914)라는 자연보호론자가 촬영한 숲 사진이었다. 루스벨트 대통령도 답신에 ‘좋은 사진’이라고 촌평했다. 1908년 이 숲이 ‘존 뮈어 국가기념물’로 명명됐음은 물론이다. 스코틀랜드 이민자인 존 뮈어는 미국에서 자연보호운동의 선구자로 칭송되는 자연주의자. 요세미티, 세쿼이아 등 시에라네바다 산맥의 국립공원 지정이 죄다 그의 자연보호활동과 저술에서 비롯된 자연보호운동의 소산이다. 존 뮈어 숲은 샌프란시스코 북쪽 19km, 소살리토 근방, 영화 ‘혹성탈출-진화의 시작’ 마지막 부분에 유인원이 인간을 피해 깃든 숲, 바로 거기다.

조성하 여행전문기자 summer@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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