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인생에 길잡이가 되어 주고 나에게 운명적인 변화의 기회를 주었던 은인 중에서 한 분을 골라 그 이야기를 쓰려고 하니 많은 분이 떠올라서 어떤 분의 이야기를 써야 할까 고민하며 많은 시간을 보냈다.
그래도 미국 유학 시절 나의 지도교수였던 세계적인 디자인 멘토 빅터 파파넥 교수가 우선 떠오른다. 유학 이전부터 그의 저서 ‘Design for the real world’(인간을 위한 디자인)를 감명 깊게 읽고 늘 공경해 왔던 파파넥 교수를 만난 것은 정말 뜻밖의 일이었다.
책 속의 절실한 내용이 떠오른다. 당시 스타일링에만 신경 쓰는 디트로이트의 자동차 디자이너들에게 일침을 놓았던 내용, 즉 자동차 디자인을 할 때 운전석 옆의 재떨이 위치를 잘못 선정하면 그로 인한 교통사고로 사람들의 생명을 앗아갈 수도 있다는 지적이다. 디자이너는 인간의 존엄성을 1순위로 여겨야 한다는 교훈을 이 책을 통해 얻었다.
그런데 유학 1년 만에 재학 중이던 일리노이대 시카고 캠퍼스에서 행운이 찾아왔다. 우연히 교내 안내를 통해 알게 된 파파넥 교수의 방문 특강을 손꼽아 기다리던 나는 강연장 맨 앞자리에 앉았다. 나는 책으로만 이해했던 교수님의 디자인 철학을 직접 들으며 강연에 푹 빠져 들었다. 파파넥 교수의 디자인 철학은, 그분이 세상을 떠난 지 오래된 지금 사람들이 화두로 삼는 ‘나눔의 정신’에 뿌리를 두고 있다.
운명적으로 파파넥 교수를 만난 나는 그와 대화를 나누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다. 강연 후 일리노이대 교수들과 함께하는 파파넥 교수 초청 만찬에 무작정 쳐들어가기로 결심했다. 지금 생각해도 어떻게 그런 용기가 생겼는지 놀라울 따름이다. 그때 무례를 눈감아주신 다른 교수님들께 감사를 드린다.
나는 만찬장 헤드테이블의 파파넥 교수 바로 옆자리를 차지해 서툰 영어로 나를 소개했다. 한국에서 온 유학생이고 수년 전 ‘Design for the real world’를 감명 깊게 읽었다는 이야기도 빼놓지 않았다. 그리고 언젠가는 그 책을 한국어로 번역해 한국 학생들에게도 전파하겠다고 말했다. 또 다른 소원이 있다면 교수님이 한 학기만이라도 나의 지도교수가 돼 주시는 것이라는 말씀도 드렸다.
파파넥 교수가 영어도 서툰 유학생의 간청을 흔쾌히 모두 들어줘 놀랐다. 몇 주 후 나는 아내와 함께 작은 차로 시카고에서 캔자스시티로 15, 16시간 운전해 파파넥 교수댁을 방문했다. 우리를 반갑게 맞아주셨던 파파넥 교수 부부의 따뜻한 모습은 지금도 잊을 수가 없다. 나는 며칠 동안 교수댁에서 묵으면서 교수님이 근무하던 캔자스 아트 인스티튜트에서 디자인 교육을 받았다.
이런 특별한 여행을 몇 차례 하는 동안 특별한 디자인 정신교육을 파파넥 교수로부터 받는 행운을 거머쥐었다. ‘Design is loving others!’(디자인은 다른 사람을 사랑하는 것)라는 깨달음도, 몇 년 전 출간된 나의 저서에 소개했던 ‘디자인은 나눔이다’라는 깨달음도 파파넥 교수의 ‘인간을 위한 디자인’이라는 철학에서 영향을 받았으리라.
파파넥 교수가 흔쾌히 들어주셨던 두 가지 요청 중 하나인 교수님의 저서 ‘Design for the real world’를 내 힘으로 한국어로 번역 출간하는 것을 실천하지 못해 나는 늘 죄송스럽게 여겨왔다. 이 책은 수십 개 언어로 번역 출간돼 세계 디자이너들이 교과서처럼 읽는 디자인의 바이블로 자리 잡은 지 오래다.
나에게 가장 큰 힘을 주신 인생의 멘토는 운명적으로 만났던 파파넥 교수다. 그러나 중요한 변화의 시점마다 나에게 힘이 되어 주신 분은 너무나 많다. 내 인생의 모든 중요한 전환기에는 빠짐없이 누군가가 있었다고 말해야 할 것 같다.
나 혼자의 힘은 너무나 미약하다는 것을 안다. 이 세상의 모든 일은 나와 다른 사람과의 관계로부터 시작된다. 요즘 많이 들리는 화두가 ‘협업’이다. 기업들도 힘을 합쳐야 경쟁력이 커진다는 비즈니스 이론이다. 그러나 내가 체험한 ‘만남’, 그리고 많은 만남을 통해 이룰 수 있었던 ‘변화’들을 돌이켜 볼 때 ‘협업이 경쟁력’이라는 사실은 새로운 이론이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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