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과 내일/송평인]디지털 시대의 名士 정치

  • Array
  • 입력 2011년 10월 7일 20시 00분


코멘트
송평인 논설위원
송평인 논설위원
‘정치인’ 박원순 변호사의 대형 사진 현수막이 서울 안국동 옛 참여연대 건물에 내걸렸다. 시민단체 출신으로 서울시장 선거 범야권 후보가 된 박 변호사의 선거사무실이 이곳에 마련됐다. 여의도에서는 한나라당 박근혜 의원이 정당정치의 수호를 역설하면서 나경원 후보 지원을 선언하고 나섰다.

SNS 정치와 시민단체의 한계

‘국가와 시민사회’라는 도식에서 보면 정치그룹(political group)이나 정당(political party)도 시민사회에서 나온 것이다. 서구에서 19세기 중반 선거권이 급속히 확대됐다. 후보자가 잘 아는 소수의 유권자 대신 잘 모르는 다수의 유권자를 상대하게 되자 단순한 정치그룹 대신 조직력과 자금력을 갖춘 정당이 등장했다. 정당에 대한 부정적 인식도 그때부터 싹텄다. 독일 사회철학자 하버마스는 정당이 애초 시민사회에서 나왔음에도 권력 체계에 포섭됐다고 보고 새로운 시민운동을 구상하는데 그것이 이른바 신사회운동이고 그 대표적 조직이 시민단체다.

그러나 서구에서 시민단체는 대체로 정치의 일원이 되는 것을 자제하고 정치에 영향을 미치는 데 만족했다. 물론 정당을 만들어 직접 정치에 뛰어든 경우도 없지는 않다. 독일에서 환경운동단체가 녹색당을 창당해 정치권에 진입했지만 아직은 군소정당으로 기민당 대 사민당의 구도를 깨지 못하고 있다. 미국에서 소비자운동가 랠프 네이더 변호사는 녹색당 대표와 무소속 등으로 여러 차례 대선에 출마했지만 공화당 민주당 양당 구도에 거의 영향을 주지 못했다. 스웨덴 독일 등에서 ‘해적당’의 새로운 움직임이 있지만 아직 미미하다.

그런데 지금 한국에서 정당이 유례가 없는 시민단체의 도전에 직면해 있다. 정당이 다른 정치 결사체를 앞서는 힘은 조직력에 있다. 박 변호사는 민주당 박영선 후보와의 대결에서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를 이용해 조직력의 한계를 극복했다. 박 변호사는 SNS의 힘을 빌려 이제 한나라당의 나 후보까지 꺾을 기세다. 그의 선거캠프에서는 자원봉사자를 모집할 때 SNS의 숙달 정도를 체크한다. 디지털의 시각으로 보면 정당의 조직력이라는 것은 19세기에 기원한 아날로그적인 것이다. 트위터나 페이스북으로 지지자를 더 효율적으로 동원할 수 있다면 정당의 조직력은 왜 필요한가.

SNS는 정당정치와는 전혀 다른 정치를 예고하고 있다. SNS 정치에서 결정적 역할은 정당의 당협위원장이 아니라 유명인이 한다. 트위터에 많은 팔로어를 거느린 조국 서울대 교수나 소설가 공지영, 혹은 김제동 김여진 같은 연예인들이 누구를 지지하냐가 중요하다. 그들이 트위터를 통해 인증샷을 요구하면 팔로어들은 충성스럽게 투표소로 달려간다. 정당정치에서 당협위원장 몇 명이 하는 역할을 유명인 한 명이 하고 있다. 디지털 시대의 명사(名士)정치라고나 할까. 서양에서 정당정치가 뿌리내리기 전 명사들이 선거를 좌지우지하던 시대가 있었다. 당시 유권자들은 정당의 정책에는 관심이 없고 명사들을 따라 투표를 했다.

범야권 주도권 잃은 민주당

그러나 명사정치는 한계가 있다. 명사들은 선거가 없으면 활약할 여지가 적어진다. 정당은 한 선거와 다음 선거 사이에서는 국민의 의견을 정책으로 집약해 국정에 반영하는 역할도 한다. SNS 정치로는 그 일을 해내기 어렵다. 박 변호사가 진다면 정당정치 위기론은 육지에 상륙한 열대성 저기압처럼 소멸할 것이지만 그가 이긴다 해도 결국 정당에 기댈 수 밖에 없다. 다만 박 변호사의 민주당에 대한 승리는 더는 민주당이 범야권의 보스를 자임해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확인해줬다. 박 변호사는 스스로 “미래에 탄생할 더 큰 민주당의 당원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민주당에서 민노당 쪽으로 확 끌려간 야당이 출현할 수도 있다. 그때 사라지는 것은 정당이 아니라 중립을 외쳐온 시민단체의 정체성이다.

송평인 논설위원 pisong@donga.com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 추천해요

댓글 0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