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전은 저자의 오랜 노력의 산물이다. 허준은 ‘동의보감’을 1596년에 시작해 1610년까지 15년 걸려 완성했다. 괴테는 ‘파우스트’를 20세에 계획해 63년이나 걸려 그가 죽은 1832년 완성했다. 토인비는 23개 문명의 흥망성쇠를 다룬 ‘역사의 연구’를 1934년에 시작해 27년 만인 1961년 완성했다.
우리나라 영어 학습서는 대개 구상에서 탈고까지 단기간에 이루어진다. ‘오려붙여 편집하기(scissors-and-paste)’나 컴퓨터로 ‘잘라내어 편집하기(cut-and-paste)’ 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더욱이 자극적인 제목으로 독자의 관심을 끌고 있는 책들의 리스트는 끝이 없다. 금방 영어를 마스터할 수 있을 것 같고, 삽시간에 점수가 팍팍 올라갈 것 같다. 쉬운 이론은 장황하게 설명하지만 어려운 부분은 무조건 외우라고 한다. 이런 ‘꽝’ 아니면 ‘맹탕’인 책을 손에 쥐면 금전과 시간만 허비한다.
책 내용이 실하면 독자들이 좋아할 것 같지만 그렇지도 않다. 지겨울 것 같으니 외면한다. 우리 특유의 ‘빨리빨리’ 국민성과 맞물려 가벼움과 약삭빠름이 판을 친다. 그저 설렁설렁 쉬워 보여야 잘 팔린다. 그러니 홍수에 마실 물이 없다. 옥(玉)은 팔리지 않고 석(石)이 팔린다. “표지로 서적을 판단하지 마라.” “턱수염이 철학자를 만드는 건 아니다.” 베스트셀러란 원래 출판업자와 서적 판매상이 만든 ‘상인 위주 데이터(merchant-oriented data)’다. ‘가장 많이 팔린 책’의 정확한 영어는 ‘모스트셀러(most seller)’다.
토익은 브랜드 가치 때문에 한국의 시장이 엄청 늘었다. 특별한 대안이 없어 토익 점수가 사람을 뽑는 잣대가 됐다. 선다형 시험은 학습을 위한 것이 아니라 평가의 편의를 위한 것이다. 채점이 용이해 결과를 신속히 알 수 있기 때문이다. 문제집을 공부하는 것은 영어 실력을 비능률적으로 향상시키는 데 기여한다. 부피와 질량을 재는 것이 아니라 가로 세로 높이 중 하나만을 재는 것과 같기 때문이다.
영어 기량을 향상시키는 공부와 영어 점수를 향상시키는 공부는 다르다. 전자는 후자에게 긍정적 영향을 미친다. 후자는 전자에게 부정적 영향을 미친다. 하나의 원리만 알면 그에 관련된 무수한 문제를 풀 수 있는데도 기초 공사에 해당하는 원론 서적을 거들떠보지 않는다. 꼼수보다는 우직하게 정석을 익혀야 한다. 기본이 튼튼해야 나중에 속도를 낼 수 있다. 손자병법에 이런 게 있다. “활을 쏠 때 구름을 보고 쏜다. 구름을 맞히기 위해서가 아니라 지상의 먼 목표물에 도달하기 위해서다.”
문법과 독해, 작문이 동일선상의 개념이라고 5000만 국민이 잘못 알고 있다. 문법은 4가지 기능, 즉 듣기 읽기 말하기 쓰기를 위한 수단과 방법으로 기능하는 하위 개념이다. ‘grammar(문법)’의 어원은 그리스어로 ‘글을 쓰는 기술’이다. 또 하나의 모토가 있다. “학습자에게 문법을 가르치지 말고, 학습자의 글이 문법에 맞도록 거들어라.” 자신의 생각과 감정을 정확하게 표현하도록 문법지식을 활용해야 한다는 말이다.
죽기 전에 ‘유레카’ ‘아하’ 하고 탄성을 자아내게 하는 깨달음을 주는 학습서를 쓰고 싶다. 영어 학습 영역의 유기적 관계를 중시한 문법을 기반으로 독해, 작문, 회화를 동시에 제압하는 방법을 확실히 제시하는 책을 쓰고 싶다. 학원 한번 안 다니고 혼자서 영어를 내 손 안에 쥘 수 있는 책을 쓰고 싶다. 변변한 학습서가 나오면 사교육도 고개를 숙일 것이다. 이런 책의 출간은 ‘홍익인간’ 이념에 부응하게 될 것이다.
이제 40년 가까이 준비해 왔으니 ‘영어의 팔만대장경’을 남기고 싶다. 8권으로 된 시리즈를 통해 한반도 영어 학습자의 궁금증을 정확하게 풀어주고 의문점을 완전하게 해소해 주고 싶다. 수천 년이 지나도 한반도 사방팔방에서 그 생명력이 유지되는 그런 책을 쓰고 싶다. 사후 노벨상을 받은 2대 유엔 사무총장 다그 함마르셸드의 말을 되새기고자 한다. “죽음을 찾지 말라. 죽음이 그대를 찾을 것이다. 그러나 죽음을 완성으로 만드는 길을 찾아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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