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는 부모의 등을 보며 자란다’는 말이 있다. 부모의 살아가는 모습이 가장 소중한 가르침이라는 뜻이다. 나 역시 훌륭한 어머니의 ‘등’을 보면서 자랐다.
어머니(차데레사·세례명)는 1910년 전북 부안에서 태어났다. 열여섯 나이에 옥구군(현 군산시) 대야면으로 시집왔다. 어머니는 오빠들의 어깨너머로 글을 깨칠 정도로 교육에 대한 열정이 남달랐다. 추수가 끝나면 밤마다 우리 집에서는 ‘안방극장’이 펼쳐졌다. 글을 몰랐던 동네 아낙들과 나는 어머니가 읽어주는 장화홍련전, 흥부전, 심청전 이야기에 귀를 쫑긋 세웠다. 어머니의 책 읽는 소리를 들으면서 자연스럽게 배움에 대한 열망을 키울 수 있었다.
어머니는 여자도 반드시 배워야 한다고 믿었다. 초등학교 6년간 내리 1등을 한 나는 호남의 명문인 이리여고(6년제)에 합격했다. 그러나 할머니는 “여자가 공부해 뭐 하냐”며 진학을 반대했다. 이때 어머니는 처음으로 할머니의 뜻을 거슬렀다.
6·25전쟁이 한창이던 1951년, 서울대 의대에 합격했다. 고교 때 맞이한 아버지의 죽음으로 가세가 기울어 어머니는 논을 팔아 학비를 보내주셨다. 방학이 돼 고향에 내려갔을 때 한 번은 동네가 발칵 뒤집히는 사건이 터졌다. 가방에 넣어간 사람 뼈가 문제였다. 방안에 인골(人骨)을 펼쳐 놓고 공부하는 나를 보고서 마을 사람들이 “부정 타서 동네가 망한다”며 야단법석이었다. 어머니는 “의사가 사람 뼈를 알아야 정확히 치료할 게 아니냐”며 나를 따뜻하게 감싸주셨다.
1958년 동인천역 앞에 개업한 병원은 번성했다. 그러나 선진의료에 대한 나의 꿈은 사그라지지 않았다. 새우잠을 자면서 공부해 1964년 32세의 늦은 나이에 미국 의사자격시험에 합격해 뉴욕으로 갔다. 당시 미국으로 간다는 것은 생이별을 의미했다. 유학이나 이민을 한 번 가면 좀체 돌아오지 않던 시절이었다. 내내 담담했던 어머니는 비행기가 이륙하자 대성통곡을 했다고 한다. 나는 미국에서 돌아온 후 마흔이 넘은 나이에 또 일본으로 박사과정 유학을 떠났다.
현실에 안주하지 않고 늘 새로운 것에 도전하는 나의 열정은 모두 어머니로부터 온 것이었다. 어머니는 1930년대 말에 중국 만주의 봉천(현 선양)에 다녀오셨다. 이때 어머니는 상하이까지 다녀오지 못한 것을 평생 아쉬워할 정도로 진취적이었다. 어머니는 나에게 “넓은 세상에서 살아야 한다”고 항상 말씀하셨다.
어릴 적 우리 집은 거지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다. 어머니는 바가지에 동냥을 주지 않고 꼭 개다리소반에 밥과 반찬, 국까지 챙겨 귀한 손님 대접하듯 했다. 그러고는 그 밥상을 나르도록 시키며 “사람은 다 똑같다. 거지라도 내 집에 찾아온 사람을 홀대하는 법은 없다”고 말씀하셨다. 어머니는 나에게 평등정신과 나눔의 실천을 가르쳐 주고 싶었던 것 같다.
1980년대까지만 해도 병원이 보증금을 받았다. 치료비를 안 내고 도망을 가는 환자가 많았기 때문이다. 이때 나는 정문 앞에 ‘보증금 없는 병원’이라고 크게 써 붙였다. 보증금이 없어 치료를 포기하는 환자들이 쉽게 병원을 찾게 하기 위해서였다. 당시 서해 섬에는 의사가 없어 전염병이 돌면 많은 사람이 죽었다. 매년 통통배를 타고 섬을 돌아다니며 무료진료와 질병 예방교육을 했다. 또 차가운 청진기에 임산부와 태아가 놀랄까 봐 청진기를 늘 가슴에 품어 내 체온으로 따뜻하게 데웠다.
어머니는 마을 부녀회장을 하면서 30, 40명이 넘는 주부를 모아서 봉사와 자선활동을 주도했다. 어머니 주변에는 항상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5000명이 넘는 가천길재단 임직원을 이끄는 나의 리더십은 이런 어머니에게서 비롯됐다.
어머니는 돌아가시기 전에 젊은 시절 농사짓던 농촌을 그리워하셨다. 나는 어머니를 위해 인천 청량산 밑에 집을 짓기 시작했다. 텃밭도 딸려 있는 집에서 어머니를 1년만이라도 모셨으면 하는 마음이 간절했다. 그러나 어머니는 집이 완성되기 전인 1998년 89세의 일기로 내 곁을 떠나셨다. 그 집에서 지금도 눈을 감고 있으면 텃밭에 고추를 심고 있는 어머니의 모습이 떠올라 그리움에 눈물이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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