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영석 대장이 안나푸르나(8091m) 남벽 등반 도중 눈사태에 휩쓸린 것으로 보인다. 그가 사고를 당한 것은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박 대장은 1996년 에베레스트(8850m) 북동릉에 오를 때 눈사태를 만나 700m를 굴러떨어졌다. 당시 함께 있던 셰르파는 목숨을 잃었다. 박 대장은 갈비뼈 두 대가 부러졌지만 살아남았다.
박 대장은 별명이 오뚝이였다. 수많은 난관을 극복하고 끝내는 다시 일어섰다. 그는 1991년 에베레스트 남서벽에서 처음 8000m급 봉우리에 도전했다. 당시 산 중턱에서 100m를 굴러떨어졌다. 바위에 부딪혀 얼굴뼈가 보일 정도로 상처가 났다. 인근에 있던 미국 원정대 의사가 마취도 하지 않은 채 그의 얼굴을 꿰맸다. 그는 이후 왼쪽 눈썹 밑에 쇠심을 3개 박았다. 그의 얼굴은 이후에도 자주 깨져 이리저리 맞추고 꿰매야 했다. 얼굴을 꿰매는 와중에도 그는 주변 루트를 살피며 반드시 다시 오겠다고 다짐했다. 그는 이후에도 여러 차례 에베레스트 남서벽에서 실패를 맛보았지만 기어코 2009년 신루트를 개척하며 이곳에 ‘코리안 루트’라는 이름을 붙였다. 히말라야 8000m급 14좌에 모두 오른 것은 물론이다.
박 대장은 고지대는 물론이고 남극과 북극을 탐험하면서 굴러떨어지기도 하고 물에 빠지기도 했지만 헤쳐 나왔다. 그를 잘 아는 친구들이 이번 실종 소식을 들으면서도 “워낙 질긴 사람이니까”라며 희망을 버리지 않는 이유다.
박 대장은 산에서는 극한의 용기와 인내력을 발휘했지만 동료들에게는 한없이 베푸는 사람이었다. 아끼는 후배들을 아예 그의 전셋집에서 데리고 살았다. 그들의 등반 활동에 모자람이 없도록 지원하느라 애썼다. 원정 등반 비용을 마련하느라 신혼예물을 팔기도 하고 아파트 전셋값을 빼낸 적도 여러 번이었다. 산악계 후배들에 대한 그의 평소 주장은 “선배는 무조건 준다”였고 등반대장으로서 그의 철학은 “무조건 내 거 안 챙기면 된다”였다.
이런 그였기에 국내 산악인들과는 형과 아우처럼 지냈다. 이번 그의 실종 사고를 맞아 국내의 내로라하는 이들이 구조대를 자청한 이유다.
그의 평소 애창곡은 ‘바보처럼 살았군요’이다. 피를 토하듯 애절하게 불렀다. 왜 그랬을까. 속세의 권력과 부를 추구하지 않았기 때문일까.
박 대장은 살아서 돌아오라. 와서 자신의 인생이 바보처럼 살아왔던 것이 아님을 알아줬으면 좋겠다. 여기 애타게 그를 기다리고 있는 국내 산악계의 뜨거운 염원이 그의 인생이 값진 것이었음을 웅변하고 있다. 오뚝이처럼 다시 돌아오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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