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세기 전 작곡가 말러는 당시 지나치게 혁신적이라고 평가됐던 쇤베르크의 음악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그의 음악을 이해하진 못하지만 그는 젊었으니 옳다.”
그 평가가 정확했는지와 별도로 최소한 그 자세만큼은 높이 쳐줄 만하다. 음악사상 수많은 원로가 새로운 음악에 눈살을 찌푸렸다. 드뷔시의 인상주의 음악을 폄하한 생상스, 젊은 세대의 바그너풍 음악을 배척한 브람스 등 헤아릴 수 없다. 어쩌면 말러는 젊었을 때 자신의 음악을 폄훼한 악단의 보수주의자들에게 ‘젊었으니 옳다’는 말로 보복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26일 서울시장 선거는 지금까지의 어떤 선거보다 세대 간 대결로 깊이 각인됐다. 여러 징후로 예고된 일이기도 했다. 조국 교수는 트위터에서 ‘부모님이 투표 못하도록 여행 보내드린다’는 어느 아들을 언급하며 ‘진짜 효자’라고 했다. 2004년 총선 당시 정동영 열린우리당 의장이 “60대 이상 70대는 투표 안 해도 괜찮다”고 말해 노년층의 분노를 불러왔을 때 이미 세대 대결은 깊이 진행 중이었다. 우리나라에서 선거의 지역색은 엷어지고 있지만 그만큼 ‘세대 색깔’은 앞으로 더 큰 영향력을 발휘할 것이다.
흔히들 분석하듯이 나이가 많을수록 우파 후보에게 쏠리고, 젊을수록 좌파 후보에게 쏠린다면 이유는 무엇일까. ‘우파=보수=기존의 것을 지키는 것’ ‘좌파=진보=바꾸는 것’이란 도식화가 옳다고 가정한다면 골치 아플 것도 없다. 나이든 이는 지키고픈 것이 많고 젊은이는 답답한 게 많기 마련이다. 국가 사회에만 한정 지을 일도 아니다. 2008년 출간된 책 ‘타고난 반항아’(프랭크 설로웨이 지음·사이언스북스)는 한 가정에서조차 어린 형제가 더 체제 반항적이라고 설명한다. 맏이는 가족 생존을 중시하는 부모의 관점에 ‘제휴’하고, 어린 동생들은 다른 활로를 찾기 때문이라는 분석이다.
집에서 막내는 계속 막내지만 사회의 막내는 언젠가 맏이가 된다. 보수적이라는 오늘날의 60대는 한일협정 반대 시위에 참여했고, 50대는 유신반대 시위를 치열하게 펼쳤다. 청년의 개혁적 열정이 장년에도 계속된다면 어떤 사회나 지금보다 훨씬 거센 개혁과 혁명의 소용돌이에서 벗어나기 힘들 것이다.
더 들여다보면 세대 갈등은 칼로 가르듯이 뚜렷한 실체가 아니라는 점도 발견하게 된다. 기득권이 안락하게 느껴지는 어른들도 자녀들이 사회 진입에 어려움을 겪는 일을 달가워할 리 없다. 세상을 바꾸고픈 청년들도 부모들이 애써 쌓은 결실이 기반을 잃었으면 할 리 없다. 다른 배경에서 형성된 서로의 관점이 답답할 뿐이다. ‘청년’과 ‘중장년’의 이해만 놓고 세대론을 강조할 경우 놓치게 되는 점도 있다. 아직 투표권이 없는 세대인 후손들의 이해는 고려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현재 우리가 손에 쥔 결실을 살아 있는 세대가 ‘잔치’를 열어 다 나눠 먹고 청산해 버릴 것인가. 그런 진보주의를 원하는 세대는 없다. 사회적 안전망을 고려하지 않고 후손들을 ‘정글의 법칙’에 맡겨 버릴 것인가. 그런 자유주의를 원하는 세대는 없다.
선거가 지나간 이번 주말에는 젊은이와 부모들이 함께 교외 여행이라도 많이 했으면 좋겠다. 각자가 가진 생각을 참정권으로 펼치지 못하도록 막는 여행이 아니라, 세대별로 차이가 있을 수밖에 없는 생각을 서로 털어놓고 공유할 기회까지 만드는 여행이라면 더 좋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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