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날 대한민국은 연예(演藝)사회다. 연예의 사전적 의미는 대중 앞에서 음악 무용 만담 마술 쇼 따위를 공연하는 행위 혹은 그런 재주다. 당연히 연예인이란 그 방면의 일에 종사하는 사람을 일컫는다. 언제부턴가 우리 사회는 연예 혹은 연예인에 대한 관심으로 미만(彌滿)하다. 연예 프로그램이 텔레비전을 점령한 지는 한참 오래며, 인터넷 포털 뉴스에서 누리꾼이 많이 찾는 기사 또한 연예계 관련 소식이 늘 으뜸이다. 시나브로 모든 대화가 연예로 수렴하고 모든 가치가 연예로 귀결되는 시대다.
연예 전성시대에는 나름대로 배경과 원인이 있을 터다. 우선 대중문화 미디어의 급속한 발전과 확산을 손꼽을 수 있겠다. 국가안보라든가 경제발전, 혹은 민주주의와 같은 거대담론의 퇴조 이후 사소한 것 또는 주변적인 것에 대한 관심이 증대한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아니면 현재의 이념적 대립과 사회적 갈등이 너무나 버겁고 힘든 나머지 피차 부담 없이 소통하기로는 연예계 뉴스나 루머가 가장 만만한지도 모른다. 분열이 심화되고 분노가 가득한 세상에 그나마 같이 웃을 일이 있고 함께 씹을 거리가 있는 것은 연예사회의 숨은 공덕일 게다. 스타는 넘치고 영웅은 없다
문제는 연예계의 사회적 비중이 커지는 차원을 넘어 우리 사회가 전반적으로 연예계를 닮아가고 있다는 점이다. 본질과 근본을 수사(修辭)와 감각이 압도하는 사회, 외양과 언변(言辯)이 실력과 내공을 능가하는 사회, 바로 이것이 본말이 전도된 연예사회의 진면목이다. 특히 정치판은 연예계와 더불어 연예사회의 쌍두마차다. 그리고 이들의 견인 효과는 전방위적으로 확산되고 있는데 대학 캠퍼스도 예외가 아니다. 국회의원, 아나운서, 작가, 과학자, 운동선수 할 것 없이, 심지어 교수조차도 예능감(藝能感) 혹은 예능력(藝能力)을 출세와 성공의 필수요건처럼 여기게 되었다.
연예사회의 특징은 인기가 ‘만물의 척도’라는 점이다. 인기가 곧 정의이자 진리인 양 행세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연예사회의 주역은 단연 인기를 먹고 사는 스타들이다. 그 결과 오늘날 우리 사회는 유례없는 스타의 홍수(洪水) 사태를 맞고 있다. 움직일 때마다 화제를 뿌리며 수많은 팬과 팔로어들을 몰고 다니는 각계의 스타들은 그 위세가 한국사회를 들었다 놓았다 할 정도다. 작금의 세상을 움직이는 힘은 인기검색, 인기순위, 인기경쟁, 인기투표, 인기몰이 등이 아닐까 싶다. 아닌 게 아니라 이번 서울시장 보궐선거에서 안철수 교수와 박원순 후보 사이에 이루어진 것도 인기협찬 혹은 인기거래였다.
스타가 지배하는 세상은 영웅의 입지가 사라지는 사회적 대가를 지불한다. 스타 숭배에 흠뻑 빠진 나머지 영웅을 꿈꾸지도, 키우지도, 지키지도 않는 것이 지금 우리나라의 현실이다. 인기를 좇는 스타는 대개 목전(目前)만 내다보며 시류에 영합하고 대중에게 아부한다. 이에 반해 영웅은 영국의 역사학자 칼라일이 말했듯이 일반 대중에게 삶의 모범과 패턴을 제시하고 창조하는 인물이다. 성실성과 진지함, 그리고 지성으로 시대정신을 대변하고, 용기와 지략으로 사람들을 미몽에서 깨어나게 하거나 나라를 위기에서 구하는 인물이 바로 영웅인 것이다. 그러한 영웅을 통해 사회는 롤모델(role model)을 얻고 목표와 자신감을 되찾는다.
우리가 점점 더 외화내빈(外華內貧)의 사회로 치닫고 있는 것은 스타는 넘치는데 영웅은 눈에 별로 띄지 않기 때문이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당장의 인기에 연연하는 수많은 스타들이 결코 아니다. 보다 절실한 것은 국민들에게 ‘피와 땀과 눈물’을 용감하게, 그리고 정직하게 요구할 줄 아는 진정한 영웅의 출현이다. 나치 독일의 공세에 따라 영국의 국가적 운명이 경각에 달린 시점에서 국민에게 앞으로 닥쳐올 고난을 경고하고 희생의 세월에 대비하자고 호소했던 처칠 같은 영웅 말이다. 유사 연예인 自任한 지식인들
좋고 싫음을 중시하는 인기 본위의 연예사회에서 언제부턴가 옳고 그름의 가치에 대해서는 서로 함구(緘口)하는 분위기다. 그런 만큼 영웅이 나타날 여지도 좁을 수밖에 없다. 어쩌면 신념과 책임의식으로 무장한 시대적 영웅이 없기에 사람들은 스타들에게 일시적인 위로를 대신 찾고 있는지도 모른다. 세상이 힘들고 어려울수록 연예사회야말로 감언이설(甘言利說)과 혹세무민(惑世誣民)의 온상이 아니겠는가 말이다. 스타를 자임(自任)하는 정치인과 개그맨, 교수와 가수, 법률가와 배우, 그리고 작가와 시민운동가가 뒤범벅이 되어 연예사회의 위력을 한껏 과시한 공연마당이 이번 서울시장 보궐선거의 또 다른 측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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