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만난 정부 외교안보라인 당국자들의 관심사는 단연 ‘10·26 재·보궐선거 이후’였다. 그 여파는 당장 당청 쇄신을 둘러싼 분란으로 나타나고 있다. 이는 곧 정부 정책 전반에 대한 조정 요구로 이어질 것이고 대북정책도 예외가 아닐 터다. 한 당국자는 “앞으로 국회를 상대하기 버거워질 수밖에 없다”고 걱정했다.
사실 압박은 이미 집권 여당에서 시작됐고 정부의 대북정책도 조금씩 변해온 게 사실이다. 홍준표 한나라당 대표는 두 달 전 이명박 대통령을 만나 “남북관계 단절에 변화가 없으면 20, 30대에 다가서기가 불가능하다”며 통일부 장관의 경질을 요구했다.
이런 요구 탓만은 아니겠지만 이 대통령은 통일부 장관을 ‘Mr. 유연성’으로 교체했다. 신임 류우익 장관은 “유연하게 접근하겠다”며 대북 지원과 교류를 늘려가고 있다. 홍 대표의 개성공단 방문을 허용한 데 이어 개성공단 도로 개·보수와 병원 건립도 추진하고 있다.
이런 변화는 그간의 기조를 흔들지 않는 범위 내에서 북한을 적절히 ‘관리’하겠다는 차원의 조치로 보인다. 하지만 과거 남한의 선거에 영향을 미치기 위해 다양한 형태의 개입을 일삼았던 북한이 내년 한 해 그 유혹을 억누를지는 장담하기 어렵다.
내년은 한반도와 주변국들의 대대적인 권력 재편이 이뤄지는 해다. 3월 러시아를 시작으로 11월 미국, 12월 한국에서 대선이 치러진다. 10월엔 중국 공산당대회가 열려 지도부가 교체된다. 북한도 4월 김일성 100회 생일을 맞아 3대 세습의 공고화를 꾀할 예정이다.
북한은 당장의 식량난 타개도 어려운 처지에 있지만 주변국의 권력 변동을 오히려 호기로 여길지 모른다. 러시아와 중국에서는 이변이 없다면 블라디미르 푸틴과 시진핑(習近平)이 최고지도자에 오를 것이 확실시된다. 이들은 김정일과 가까운 ‘친북(親北) 인사’다.
푸틴은 2000년 러시아 정상으로선 처음으로 북한을 방문한 뒤 김정일을 ‘현대인’이라고 묘사하며 “유연한 사고의 소유자”라고 치켜세웠던 인물이다. 시진핑 또한 2008년 부주석 취임 후 첫 방문지로 북한을 택했고, 지난해엔 “항미원조전쟁(6·25전쟁)은 침략에 맞선 정의로운 전쟁이었다”고 말해 논란을 사기도 했다.
반면 내년 한국과 미국은 민주국가의 선거가 으레 그렇듯 불확실성에 싸여 있다. 북한이 이런 ‘기회의 창’을 지켜보고만 있지는 않을 것이다. 북한의 도발을 막기 위해선 빈틈없는 안보태세로 군사적 억제력을 발휘해야 한다. 그러나 안보에 100%는 없다. 허를 찌르는 기습을 차단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차선책은 적극적인 관계 개선을 통한 ‘비(非)적대화’일 것이다. 미국도 이미 ‘전략적 인내’에서 탈피해 ‘전략적 관여’로 방향을 틀었다. 북-미 대화는 협상이 아닌 ‘관리’ 차원이라고 밝히고 있지만 여건만 조성되면 관계 개선에 적극 나설 태세다.
정부도 남북 정상회담 가능성에 주목하는 듯하다. 류 장관은 “대통령이 정상회담을 해야겠다고 집착하지 않고, 하지 않겠다고 배제하지도 않는 점은 내가 가진 큰 자산”이라고 말했다. ‘기조를 크게 손상하지 않는 범위에서 정상회담을 추진하겠다’는 의미로 읽힌다.
정부는 이제라도 분명한 의지를 갖고 유연성의 묘미를 제대로 살릴 때가 아닌가 싶다. 예고된 국내외 정세의 격변을 앞두고도 ‘정책은 없이 태도만 앞세우는(no policy, only attitude)’ 식의 원칙 고수는 큰 후회를 남길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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