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에서/허두영]악어는 머리를 돌리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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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1년 11월 14일 03시 00분


허두영 과학동아 편집인
허두영 과학동아 편집인
저온물리학에 대한 업적을 인정받아 1978년 노벨 물리학상을 받은 소련의 물리학자 표트르 카피차의 별명은 ‘악어’다. 그는 일이든 연구든 한번 방향을 정하면 악어처럼 저돌적으로 추진하는 스타일로 유명했다. 나중에는 그의 외모조차 악어를 닮은 것처럼 여겨질 정도였다.

1933년 설립된 영국 케임브리지대 몬드연구소 입구 한쪽 벽에는 위로 기어오르려는 악어 한 마리가 새겨져 있다. 초대 소장으로 부임한 카피차를 상징하는 장식이다.

개소식에서 카피차는 건물의 안전성을 묻는 스탠리 볼드윈 전임 영국 총리에게 “나를 믿으세요. 나는 정치가가 아니니까요”라고 태연하게 대꾸했다. 물질적인 혜택을 약속할 테니 조국을 위해 연구하라는 소련의 뱌체슬라프 몰로토프 총리에게 “황금 새장에 갇힌 새는 절대로 울지 않는다”고 버티기도 하고, 수소폭탄을 개발해 달라는 스탈린 총리의 제안을 거부했다가 10년 동안 가택에 연금당하기도 했다.

일개 대학의 부설 연구소장이 당시 근무하던 나라(영국)의 전임 총리는 물론이고 모국인 소련 총리의 질문이나 제안을 이렇게 무시해도 되는 것일까.

“악어는 머리를 돌리지 못한다. 과학과 마찬가지로 악어는 모든 것을 잡아먹는 아가리를 가지고 언제나 앞으로만 나아간다.” 카피차는 과학자로서 자신이 옳지 않다고 생각하는 그 어떤 것과도 타협을 거부했다.

기초과학, 순수과학, 자연과학… 뭐라고 부르든 과학은 ‘악어처럼’ 맹목적이다. 노벨상을 받은 리처드 파인먼은 “과학은 전문가의 무지를 믿는 것이다”라고 했고, 미국의 화학자 호머 애킨스는 “기초 연구란 허공에 화살을 쏜 다음, 떨어진 지점에 가서 과녁을 그리는 것과 같다”고 했다.

우리나라 정부는 과학의 이런 ‘악어’ 특성을 과연 얼마나 이해하고 수용할 수 있을까. 대통령이나 장관의 성향에 따라 ‘악어’의 머리를 돌리려 하고, 섣부르게 단기적인 성과를 닦달하며 꼬리를 잡아채려는 것은 아닐까.

정부는 세계 수준의 기초과학 연구를 통해 창조적 지식과 미래원천 기술을 확보하기 위해 내년 1월에 기초과학연구원을 설립한다. 대통령이 임명하는 원장은 임기 5년 동안 매년 5억 원 상당의 연봉을 받으면서 산하 50개 연구단과 중이온가속기 사업단에서 3000명의 인력을 지휘한다. 연간 7000억 원(2017년 기준)의 예산을 주무르면서 국가의 기초과학 방향을 결정하고 5조2000억 원짜리 과학벨트 사업을 주도하는 것이다.

교육과학기술부는 기초과학연구원을 세계 수준의 연구기관으로 육성할 수 있는 비전과 경영능력을 갖춘 원장을 모시기 위해 최고의 과학저널인 ‘네이처’와 ‘사이언스’에 원장 공모 광고까지 실었다.

그러나 정부의 집요한 관치(官治) 본능을 간파한 세계적인 석학들은 원장 자리를 제안받고서도 점잖게 거절한 것으로 알려졌다.

교육부는 어제 신임 원장 후보를 발표했다. 신임 원장은 머리를 돌릴 수도 없고 꼬리를 잡을 수도 없는 ‘악어’가 되어야 한다. 정부는 신임 원장이 ‘악어’가 될 수 있도록 절대적으로 믿고 맡겨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누군가 기초과학연구원 본관 건물에 꼬리를 자르고 도망가는 도마뱀이나 환경에 따라 색깔을 바꾸는 카멜레온을 몰래 그려 놓을지도 모른다.

허두영 과학동아 편집인 huhh20@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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