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公)이 우리 대도호부의 부사로 계시면서 가시는 곳마다 은혜를 베푸셨네/악정의 문적을 태워 없애니 그 은택이 두루 미쳤네/한창 해가 남루를 비추니 예처럼 춤추며 즐겨 하리라/돌에 글을 새겨 기리니 그 은덕 영원토록 사라지지 않으리/공이 떠난 지 16년에 작고하시니 이듬 을묘에 안동 38방의 소민들이 세우니 때가 함풍 5년 9월이라.’ 경북 문경시 문경새재도립공원에 있는 안동부사 김수근의 송덕비인 추사타루비(追思墮淚碑)의 내용이다. 철종 5년인 1855년 김수근이 안동부사로 내려와 선정을 베푼 것을 기려 세웠다.
▷타루비란 진나라 때 양양 사람들이 양고의 선정(善政)을 잊지 못해 그의 비(碑)만 보면 눈물을 흘렸다는 데서 유래했다. 우리나라에서 타루비가 세워진 첫 인물은 이순신 장군이다. 문경새재로 오르는 길에는 역대 관찰사와 현감들의 송덕비가 일렬로 서 있다. 총 26기의 비 가운데 충렬비 1기, 탑비 2기를 제외한 23기가 지방수령들의 은공을 기리는 송덕비(頌德碑)다. 다른 비는 모두 석조(石彫)지만 하나는 무쇠로 만든 철비(鐵碑)다.
▷김훈의 소설 ‘흑산(黑山)’에는 ‘작은 마을에 일년 동안 현감이 네 번 바뀌어 떠나는 수령의 전별금을 모으고, 돌을 캐고 다듬어서 송덕비를 세우는 사이에 신관 행차가 또 들이닥친다’고 백성들의 고통을 적고 있다. 이러다 보니 끼닛거리도 없는 마을 어귀에 송덕비 스무 개가 즐비하게 들어섰다는 것이다. 나라 전역에 허다한 송덕비를 보면 훌륭한 목민관(牧民官)이 많았다는 말인데 정말 그런 것 같지는 않다. 송덕비는 세도정치가 극에 달해 매관매직과 가렴주구가 성행했던 헌종 이후 집중됐다. 고부군수 조병갑은 태인현감을 지낸 부친의 송덕비를 세운다며 돈을 거두다 동학농민운동의 도화선을 제공했다.
▷서울 동작문화원 앞에 세워진 김우중 전 동작구청장의 송덕비가 눈총을 받고 있다. 동작문화원에 기여한 김 전 구청장의 공적을 기려 문화원 관계자들이 ‘동작을 빛낸 인물’이라는 이름으로 사재를 출연해 세운 것이라지만 왕조시대도 아니고 구청장의 송덕비라니 황당할 따름이다. 김 전 구청장이 주도한 일은 아니라 하지만 지금이라도 치우는 것이 조롱거리가 되지 않는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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