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년 5월에 짧은 시 모음집 ‘둥근 세모꼴’을 냈다. 그 시집에서 ‘서울천리를 와서 가랑잎 하나 줍다’라는 한 줄 시는, 박목월 시인의 일행시(一行詩) 시집에서 뽑아온 것임을 각주로 밝혔다. 1963, 64년 가을쯤 당돌하게 한 줄짜리 습작 시를 보여드렸으니, 야단치신 적은 없었지만 그래도 혼날까 겁먹은 내게 선생님의 일행시집에 넣자고, 그것도 내 이름으로. 어쩔 줄 몰라 황송했으나, 출판사가 다른 작품과의 균형으로 내 이름을 지워버렸고, 그 사실에 선생님은 미안해하시며 “훗날 외줄시집을 낼 때 빼 가그라”라고 하셨던 말씀도 밝혔다.
중고교 시절 먼발치에서 만난 시인 박목월의 엽서를 받은 때는 대학 2학년 봄이었나? 4·19에 5·16까지 거치며 서울 유학 와서 학교 출입조차 금지된 연속휴학을 일기장에다 화풀이하던 중 문득 시인 아닌 아무것도 안 되겠다고 맹세했던 중학교 적을 떠올리게 됐다.
관제데모에 동원되지 않은 중학교 적 어느 날, 문예반에서 소월시 ‘산유화’의 ‘갈 봄 여름 없이 꽃이 피네(지네)’의 계절 순서와 사투리 ‘갈(가을)’을 질문했다가 선생님으로부터 대망신을 당하고는, 반드시 시인이 되어 선생님 앞에 나타날 복수를 맹세했는데. 여기까지 떠올리자 즉시 헌책방으로 달려가 과월호 ‘현대문학’에서 박목월을 만났고, 시 공부하겠다고 드린 내 편지에 곧바로 ‘시작노트 가지고 한양대 연구실로 놀러오게’라는 엽서를 받은 영광과 흥분의 봄을 보내다가 새 노트를 사서 일기장의 시를 옮기고 용기를 냈다.
드디어 왕십리행 전동차에 올랐고, 채소밭 인분냄새조차 감미로워하며, 찔레꽃 만발한 한양대 언덕을 올라가면서도 부디 선생님이 안 계시기를 빌었는데. 연구실 문 위의 불빛 새는 유리창을 쳐다보며 노크도 못했는데, 외출 나가시던 선생님은 문 앞에 서 있는 내게 “자네가 유 군이가?” 하시며, 나가는 참인데 가면서 시작노트 보자고 화신백화점 뒤 설렁탕집으로 데려가셨다. 설렁탕이 나오자 소금그릇을 옆에 놓고는 내게 넘겨주시지 않고 잡수시며 계속 질문만 하셨고, 감히 소금그릇을 집어올 용기도 없고 물음에 대답하느라 절절매며, 맨설렁탕을 먹는 둥 마는 둥했는데. 내 그런 꼴을 보시고는, ‘저런 숙맥(菽麥)이니 시는 곧잘 쓰겠다’고 판단하셨다는 회고담은 오랜 후에 들려주셨다.
이듬해 가을이었나? 위의 내 외줄 시를 칭찬 겸해서 그렇게 대접해 주셨고, 이 외줄 시로 자신감을 얻은 나는, 흰 고무신에 맨발로 대님도 안 맨 한복 차림의 선생님을 매년 2, 3회 정도 원효로 로터리 심정다방에서 뵙곤 했다. 졸업을 앞두고 습작시를 보여드리자, 선생님은 “차암 좋다” 하시며 돋보기를 머리 위로 밀어 올리시다간 금방 정색하시더니 “유 군! 나는 시 몇 편 좋다고 시인 안 맨드네. 그랬다가 힘들다고 시 안 쓰면 나는 뭐가 되노?”라고 어조를 바꾸셨다. 그날 울음을 씹으며 돌아왔다. 시인이 돼 복수할 중학교 적 선생님도 잊기로 했다.
다시 이듬해 졸업 직전 버릇처럼 서점에 들렀다가, 신간 ‘현대문학’에 초회 추천되었음에 놀라고 너무도 겁나서 감사전화도 못 드린 채 며칠간 잠을 못 잤다. 이후 지방 여학교에 근무하며 우송해 드린 작품으로 3회 추천을 완료한 1967년 겨울 첫눈 오던 날, 예고도 없이 학교로 찾아오신 선생님을 학급 조회에 들어가다가 현관에서 마주쳤다. 교장선생님의 주선으로 전교생과 박목월 시인의 만남 뒤 점심자리에서 교장은 내게 술을 따라 드리라고 했으나 너무 떨린 나는 또 실수하고 말았다. “유 군, 맥주는 그래 따루는 게 아닐세”라며 거품범벅된 손을 닦으며 한참이나 웃으셨지만, 나는 술병만 보면 손 떨리는 증세가 생겼고, 그 일로 해서 어떤 자리 누구에게도 술을 절대로 안 따르게 되었다.
늘 이렇게 숙맥 짓만 보여드린 내게, 시 잘 쓰려면 국문학보다는 교육심리학 공부가 더 좋겠다고 하신 권유대로 공부했지만, 아직도 선생님 기대에 못 미치는 죄송스러움만 더해갈 뿐…. 미소가 청노루 닮은 듯 기억되는 어지신 모습이 오늘따라 더 그립고 그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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