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의 눈/유재동]네덜란드도 64년 만에 식민통치 만행 사과하는데…

  • 동아일보
  • 입력 2011년 12월 8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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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재동 국제부 기자
유재동 국제부 기자
1947년 12월 9일, 인도네시아 자바 섬 서부의 라와게데라는 작은 마을에 네덜란드군이 들이닥쳤다. 가옥들을 샅샅이 수색한 군인들은 들판에 15세 이상의 남자들을 줄지어 세워 놓고는 인도네시아 독립군의 행방을 다그쳤다. 주민들 모두가 “모른다”고 말하자 갑자기 네덜란드군의 총질이 시작됐다. 제2차 세계대전 직후였던 당시 인도네시아는 식민지배국인 네덜란드와 치열한 독립전쟁을 벌이고 있었다.

‘라와게데의 학살’로 무고한 양민 431명이 목숨을 잃었다. 대부분의 시신은 폭우에 휩쓸려갔고 강물은 핏빛으로 물들었다. 마을엔 한동안 시신 썩는 냄새가 진동했다. 학살 다음 날 한 여성은 남편과 12세, 15세 난 두 아들의 시신을 한꺼번에 땅에 묻어야 했다. 인도네시아인들에게 이 사건은 제국주의 네덜란드의 만행을 상징하는 가슴 아픈 역사의 한 장면으로 남아 있다.

인도네시아는 1949년 독립을 쟁취했지만 유족들의 한은 쉽게 풀릴 수 없었다. 1969년 네덜란드 정부는 인도네시아 독립전쟁 시절 자행한 네덜란드군의 위법 행위를 조사해 발표했다. 그러나 많은 사실을 축소, 왜곡했다는 비난을 받았다. 네덜란드는 이후에도 ‘깊은 유감’을 표하는 수준에 그쳤을 뿐 손해배상은 끝까지 거부했다. 공소시효가 만료됐다는 이유에서였다.

하지만 사건 발생 62년째가 되던 2009년, 유가족들이 네덜란드 정부를 상대로 소송을 제기한 것을 계기로 네덜란드 내부에서 변화의 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국회의원들 사이에선 “라와게데 사건은 전쟁범죄이며 가볍게 볼 사안이 아니다”는 공감대가 확산됐고 유력 언론들은 사설을 통해 “전범에 공소시효는 존재하지 않는다”며 정부를 몰아세웠다. 마침내 네덜란드 법원은 올 9월 네덜란드 정부의 배상 책임을 인정하며 유족들의 손을 들어줬다. 네덜란드는 소송을 제기한 유족 및 생존자 9명에게 각각 2만 유로(약 3000만 원)를 지급하기로 하고 정부 명의의 공식 사과문을 주인도네시아 대사를 통해 주민들에게 전달하기로 5일 결정했다.

비록 64년 만의 뒤늦은 사과지만 진심으로 잘못을 인정하는 네덜란드의 태도는 진실을 영원히 은폐할 수 없음을 보여준다. 반면 한국을 강점하며 저지른 숱한 죄악에 대한 일본 정부의 공식 사과는 과연 언제 이뤄질지 여전히 기약할 수 없다. 일본군위안부 피해 할머니들의 수요 집회가 다음 주면 1000회째다. 일본은 네덜란드에서 역사의 교훈을 배워야 한다. 인권을 존중하는 양심국가를 표방하려면.

유재동 국제부 jarrett@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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