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문명 기자의 사람이야기]미림여자정보高 당찬 여학생들

  • 동아일보
  • 입력 2011년 12월 12일 03시 00분


“대학, 포기가 아니라 초월… 세계 최고의 앱 개발자 될겁니다”

앱 개발자로서 2년 동안 갈고닦은 기량을 선보인 6일 행사에서 스마트TV와 스마트폰용 앱을 개발해 대기업 관계자들에게서 호평을 받은 미림여자정보과학고 여학생들. 작품을 낸 2학년 학생 60명을 대표해 다섯 명이 인터뷰에 응했다. 왼쪽부터 양혜진, 이지화, 이해수, 김나래, 김남주 양. 허문명 기자
앱 개발자로서 2년 동안 갈고닦은 기량을 선보인 6일 행사에서 스마트TV와 스마트폰용 앱을 개발해 대기업 관계자들에게서 호평을 받은 미림여자정보과학고 여학생들. 작품을 낸 2학년 학생 60명을 대표해 다섯 명이 인터뷰에 응했다. 왼쪽부터 양혜진, 이지화, 이해수, 김나래, 김남주 양. 허문명 기자
6일 서울 관악구 미림여자정보과학고(교장 장병갑·이하 미림정보고)에서는 ‘마이스터 HR 포럼 2011’이라는 행사가 열렸다. 흔히 대학 졸업자들의 영역으로 여겨졌던 소프트웨어(SW) 개발 분야에서 여고 2년생들이 스마트TV 애플리케이션, 모바일 SW, 게임용 앱을 선보인 것. 이 행사에는 KT, 삼성전자, SK그룹 내 정보기술(IT) 계열사인 SK C&C, NHN, 한국소프트웨어기술진흥협회 등 내로라하는 SW 관계자들이 참석했다.

NHN next(NHN SW교육기관) 최정훈 인사팀장은 “실력들이 상당했다. 창의와 열정이 있는 학생들을 발굴해 현장형 인재로 키우고 싶다”고 했다. 이미 2학년 학생 10명은 2013년 1월 전문대졸 수준의 급여를 받기로 하고 삼성전자 취업이 확정된 상태다. SK C&C도 학생들을 선발해 개발자로 받겠다는 뜻을 피력했다.

미림정보고의 전신은 1991년 국내 최초의 전산고등학교였던 미림전산고. 2009년 뉴미디어콘텐츠 분야 마이스터고로 지정돼 새롭게 개교한 뒤 2010년 첫 신입생을 받았다. 전국 21개 마이스터고 중 유일하게 뉴미디어콘텐츠 분야 마이스터를 양성하는 고교다.

8일 오후 기자는 학교를 찾아 이번 행사에 작품을 낸 김남주, 김나래, 이해수, 이지화, 양혜진 등 다섯 학생을 만났다. 대학 진학 대신 전문기술인의 길을 택한 이유가 궁금했다. 올해 주민등록증이 나왔다는 열여덟 살 여고생들에게서 기대하지 않았던 진지한 말들이 쏟아졌다.

“반에서 5등 안에 들었지만 인문계 나와 봐야 뭘 직업으로 할 수 있을까 하는 고민이 많았다. 의사 일을 접고 마흔 나이에 정말 하고 싶은 일이었다며 컴퓨터 애프터서비스업으로 직업을 바꾼 아버지의 영향이 컸다. 어릴 적부터 ‘하고 싶은 일을 해라. 대학은 그 다음’이라는 말을 많이 듣고 자랐다.”(혜진)

“스티브 잡스, 빌 게이츠도 모두 대학을 그만뒀다. 중요한 것은 대학이 아니라 내가 정말 좋아하는 일을 찾는 거라고 생각한다. 대학을 포기하는 대신 스스로 나에게 맞는 고등학교를 찾아야겠다고 생각했다. 인터넷 서치를 해가며 미림정보고를 찾아냈다.”(해수)

“9세 때 아버지를 따라 태국에서 초등학교를 마치고 귀국해 중학교에 입학했는데 친구들이 진학을 고민하면서 자기가 하고 싶은 것을 찾기보다 부모님이나 선생님이 권하는 길을 가는 게 이상했다. 내 인생은 내 것 아닌가. 남의 눈치 안 보고 내가 길을 정해 가고 싶었다.”(지화)

“대학을 안 가겠다고 하니 부모님보다는 오히려 친구들이나 학교 선생님들의 반대가 심했지만 고집을 꺾지 않았다. 내 선택에 만족한다.”(남주)

이들은 모두 중학교 때 성적이 상위권이었다고 했다. 대학 진학을 목표로 해도 무리가 없는 좋은 성적들이다. 실제로 10월 25일 서울시교육청 산하 마이스터고 2012년 신입생 전형 결과 서울시내 마이스터고 2곳인 수도전기공고 200명과 미림정보고 120명 모집에 중학교 내신 성적 상위 20% 이내 해당 응시생이 각각 218명과 70명이었다.

마이스터고 학비는 전액 장학금이고 기숙사 생활을 한다. 아무래도 형편이 빠듯한 학생이 많을 것이다. 하지만 이들에게서는 집안 형편 때문에 대학을 포기했다는 그늘이 없어 보였다. 무엇보다 청년백수가 넘치는 세상이라 그런지 고교 졸업 후 무조건적인 대학 진학에 회의적이었다.

“동생이 밑으로 둘이다. 모두 2년 터울이다. 그런데 대학등록금이 너무 비싸다. 우리 삼남매가 고등학생, 대학생일 때 부모님 형편으론 도무지 감당이 안 될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맏이로서 부모님께 부담을 드리고 싶지 않다는 마음도 있었지만 대학을 나와 봐야 직업 구하기 어려운 세상이라는 것에 회의가 들었다. 대학이 중요한 게 아니라 내가 좋아하는 전문기술을 찾아 익혀 직업을 스스로 찾아야겠다고 생각했다.”(나래) “나 역시 집안 형편이 좋은 것은 아니었지만 그것이 대학을 포기한 이유의 전부는 아니다. 무엇보다 수능에 얽매여 살고 싶지 않았다. 내가 선택한 길이라 생각하니 공부가 재미있다.”(남주)

이들에겐 어릴 적부터 겪은 ‘생활의 무거움’이 오히려 ‘앞으로 무엇을 할 것인가’ ‘어떤 직업을 갖고 먹고살 것인가’ 하는 현실적인 고민을 갖게 한 약(藥)이 된 것 같았다. “별 어려움 없이 살다가 경제위기 때 잠시 집안이 어려워진 적이 있었다. 직업이 주는 안정감, 경제력이 얼마나 중요한지 일찍 깨달은 편(웃음)”(해수)이라고 하니 말이다.

이들은 모두 유치원 때부터 컴퓨터로 수업을 받은 디지털 신세대이기도 하다. 다섯 명 모두 초등학교 때 워드프로세서, 파워포인트, 엑셀 등을 배웠다고 했다. 인터랙티브미디어과, 뉴미디어디자인과, 뉴미디어솔루션과 등 3개 반으로 운영되는 미림정보고의 일부 수업은 대학 1, 2학년 전공과정 못지않을 정도로 깊이가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함기훈 지도교사는 “수업시간에 엎드려 자는 학생은 없다. 남들이 대학 들어가서 6, 7년에 걸쳐 배우는 과정을 2, 3년 만에 빨아들인다. 동기부여가 확실히 돼서 그런 것 같다”고 전했다.

“프로그램을 개발하다가 문제가 안 풀리면 밤을 새운다”는 여고생들에게 “개발자 일은 아무래도 여자가 하기에 힘든 것 아니냐”고 묻자 “여자라서 장점이 되는 점도 많다. 남자 애들은 게임을 하더라도 죽이고 이기는 것을 좋아하지만 여자들은 교육용이나 환자 치료용 프로그램 개발에 관심이 많다. 나는 주부들이 생활하기에 편리하도록 TV를 통한 홈오토메이션 프로그램을 제대로 만들어 보는 게 꿈”(남주)이라는 답이 돌아왔다.

“개발과 관련한 아이디어를 주로 주변 사람들에게서 얻는 편이다. 어떤 것이 생활에 불편한지, 어떤 것이 필요한지 가족이나 친구들의 말을 허투루 듣지 않는다. 수다 떨다 보면 아이디어가 떠오를 때가 많다. 연말에 수험생들을 위해 ‘응원 앱’을 개발할 예정이다. 친구 중에는 벌써부터 온라인쇼핑몰을 구상해 사장님이 되겠다는 아이들도 있다.”(해수)

기자가 “그래도 막상 사회에 나가 우리 사회가 엄연한 학력 사회라는 현실을 접하면 실망할지 모른다”고 하자 “능력만 있으면 무시당하지 않을 자신이 있다. 대학은 포기가 아니라 잠시 늦추는 것”(나래)이고 “열심히 일하다 공부할 필요가 생기면 야간대라도 가겠다. 하지만 필요 없다고 생각되면 안 갈 것”(혜진)이라는 답이 돌아왔다.

이날 인터뷰에서 가장 인상적이었던 대목은 이들의 취업관이었다. 다들 표현은 약간씩 달랐지만 “직업은 누가 쥐여주기 전에 스스로 찾는 것”이라고 했다. 정부나 사회를 향해 별다른 비판도 없고 기대도 별로 안 한다는 취지의 발언들이었지만 기자에겐 “내 삶은 내가 만들어간다”는 자립심이 강한 것처럼 읽혀 대견하게 느껴졌다. 하긴 중학생 시절부터 ‘무엇을 하며 먹고살 것인가’를 고민했다는 여학생들 아닌가.

‘실전적인 기능인 양성’에 주력하는 마이스터고가 모든 학생에게 정답을 줄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이들이 말하는 삶에 대한 자세만큼은 어른들도 배울 점이 많아 보였다.

뉴미디어콘텐츠 분야 마이스터고로 지정된 미림여자정보과학고 학생들은 다양한 콘텐츠를 보다 편리하고 빠르게 제공할 수 있도록 지원하는
 프로그래밍 기술부터 멀티미디어 기술, 웹 기반 환경에 맞는 디자인 관련 과목도 배운다. 학생들의 실습 모습. 미림여자정보과학고 
제공
뉴미디어콘텐츠 분야 마이스터고로 지정된 미림여자정보과학고 학생들은 다양한 콘텐츠를 보다 편리하고 빠르게 제공할 수 있도록 지원하는 프로그래밍 기술부터 멀티미디어 기술, 웹 기반 환경에 맞는 디자인 관련 과목도 배운다. 학생들의 실습 모습. 미림여자정보과학고 제공
교문을 나서는 기자의 머릿속에는 ‘반값 등록금’도 좋지만 청소년들에게 ‘바다’를 꿈꾸게 하고 ‘배 만드는 법’을 가르치는 일도 교육정책의 핵심으로 놓아야 하지 않을까, 과연 우리 기성세대는 “고등학교만 졸업해도 사회적으로 성공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다”는 이 여고생들의 꿈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는 것일까…하는 생각이 스쳤다. 어깨가 무거워졌다.

허문명 기자 angelhuh@donga.com   
■ 여고생들이 만든 소프트웨어들


일찍이 앨빈 토플러는 미래사회는 소비자가 생산에 참여하는 프로슈머 시대가 될 것이라고 예언했지만 현대사회는 소비자가 아예 필요한 것을 스스로 만드는 생산자 시대로 향하고 있다. 미림정보고 여고생들이 만든 소프트웨어들을 보다 보면 이를 절감한다. 6일 전시에 나온 24개의 앱도 체험과 필요에서 나온 것들이 대다수였다. 주요한 것들을 간추린다.

◆스마트TV 부문

○ 헬퍼(Helper)=불우한 이웃을 소개하는 텔레비전 프로그램을 보다가 “도와주고 싶다”는 어머니 말에 영감을 받아 만든 작품. TV 리모컨으로 살고 있는 지역이나 봉사활동 하고 싶은 지역을 누르면 봉사할 단체와 활동 등이 소개된다. 희망하는 봉사활동을 리모컨으로 선택하면 활동 내용과 연락처 등 상세한 정보를 확인할 수 있다.

○ 200점짜리 엄마 되기=임신부들의 관심사인 태교 정보를 담았다. 임신부와 태아에게 필요한 것, 불필요한 것들에 대한 정보가 망라돼 있고 임신 주기별로 할 수 있는 요가 정보를 그래픽화해 동작을 보여 주고 따라할 수 있게 제작돼 있다.

○ ‘보일락말락’ ‘종합병원’=집에서도 간편하게 TV 모니터 화면에 나타난 시력판으로 시력검사를 할 수 있고 허리디스크, 우울증 테스트, 입 냄새 테스트, 갑상샘 테스트 등을 할 수 있다. 병원과 연계해 상세한 의료정보를 받을 경우 프로그램의 질이 높아질 수 있는 가능성이 엿보인다는 평을 들었다.

○ 분리수거하는 날=쓰레기 처리에 고민하는 주부 마음을 헤아린 프로그램. 쓰레기 분리 요령, 아파트 동마다 다른 쓰레기 배출일 알려주기, 가족끼리 떠넘기기 쉬운 쓰레기를 당번을 정하는 룰렛 기능도 포함시켰다.

◆스마트폰 부문

○ 한 꼬마=자폐아교육용 프로그램. 개발자가 외국에 나갔다가 외국어가 서툴러 고생한 경험을 바탕으로 ‘외국어가 이렇게 힘든데 모국어도 제대로 못하는 장애아들은 얼마나 힘들까’ 하는 생각에서 만들게 됐다고 한다. 서울시가 주최한 창의아이디어경진대회에서 대상을 받기도 했다.

○ Doggy Hospital=기르던 반려견이 병이 걸렸을 때 마땅한 응급대처법을 찾을 수 없어 고생하던 경험에서 나온 앱. 트윗 등을 이용해 반려견 키우기 정보나 비상상황이 발생했을 경우 견종에 따라 상처나 질환 부위를 찍어서 누리꾼들끼리 서로 응급 대처 정보를 교환하는 항목도 있다.

○ 똥순이=기숙사 생활을 하면서 화장실을 오래 사용할 경우 난처했던 경험을 살려 만든 앱. ‘사람 있어요’ ‘휴지 좀 주세요’ 같은 것을 미리 녹음해 상황이 발생했을 경우 틀어주거나 인기척 내기, 쾌변다이어리, 쾌변 정보, 변기에 앉아서 즐길 수 있는 게임 등이 담겼다.

○ 기타=어린이집에 관한 정보를 담은 어린이집 앱, 용돈 부족으로 고민하는 청소년들의 심리를 반영한 ‘저금의 힘’, 기계음이 아닌 엄마나 선생님의 목소리를 저장해 아침잠을 깨우도록 한 알람 앱 ‘얼릉 인나’ 등이다. 게임 앱도 ‘엄마와 공부 못하는 아이와의 달리기’, 출제되었던 수능 문제를 활용해 만든 ‘나는 수험생이다’처럼 생활에서 출발한 것들을 선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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