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준규 전 검찰총장이 총장 재임 중이던 올해 초 검찰의 기소로 재판을 받고 있던 이국철 SLS그룹 회장을 만난 사실이 밝혀졌다. 김 전 총장은 “이 회장이 억울해한다는 얘기를 전해 듣고 1심 재판이 끝난 뒤 만났다”며 “검찰 수사로 SLS그룹이 무너졌다는 소문도 있어 총장으로서 상황 판단을 하기 위해 만난 것”이라고 변명했으나 부적절한 처신이었다.
이 둘 사이에 다리를 놓은 문환철 대영로직스 대표는 이 회장으로부터 SLS 구명 로비자금으로 7억8000만 원을 받은 혐의로 최근 구속됐다. 김 전 총장은 “문 씨와는 고검장 시절부터 친지의 소개로 만나 안부인사 정도 하고 지내는 사이”라고 밝혔다. 문 씨가 SLS그룹의 로비스트인 줄 몰랐다는 주장이지만 검찰총장이 상급심이 남아 있는 재판의 피고인을 만난 것은 의혹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하다. 이전까지 몰랐던 기업인을 고검장 시절부터 알고 지냈다는 점도 개운치 않은 뒷맛을 남긴다.
김 전 총장은 “이 회장이 억울함을 호소한 사연에 증거가 없어 범죄 정보로는 가치가 없다고 판단해 별다른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며 “(언론이) 마치 이상한 뒷거래를 한 것처럼 검찰의 명예를 훼손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러나 김 전 총장이 이 회장을 위해 어떤 조치를 해줬는지에 관계없이 이 회장을 만난 사실부터 문제다.
검사는 자신이 취급하는 사건의 피의자 피해자 등 사건 관계인과 정당한 이유 없이 사적으로 접촉해서는 안 된다고 검사 윤리강령에 나와 있다. 검찰의 정점(頂點)에 있는 검찰총장은 사실상 모든 수사를 지휘할 수 있다. 그렇다면 모든 검사의 사건 관계인이 검찰총장에게도 사건 관계인이 될 수 있는 만큼 처신에 더욱 유의했어야 했다.
이국철 구명 로비에 개입된 전현직 검찰 고위간부가 4, 5명이라는 말이 나오고 있다. 이 회장은 검찰이 압수한 비망록에 ‘검찰의 최고 간부님과 한식 겸 퓨전 양식 메뉴로 식사했는데 좋은 시간을 보냈다’고 적었다. ‘최고 간부님’은 물론 김 전 총장을 뜻한다. 이 회장은 ‘문 씨가 검찰 간부들에게 전달해야 한다고 해서 돈을 줬다’고 썼다. 검찰은 김 전 총장을 포함해 거론되는 사람을 철저히 조사해 로비자금이 어디로 갔는지 규명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