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광장/전상인]재벌, 자본주의 도덕적 진화 선도하라

  • 동아일보
  • 입력 2011년 12월 23일 03시 00분


전상인 객원논설위원·서울대 환경대학원 교수
전상인 객원논설위원·서울대 환경대학원 교수
이명박 정부가 출범하기 직전인 2008년 1월 초, 바로 이 지면에서 우리나라가 ‘헝그리(hungry)’ 사회에서 ‘앵그리(angry)’ 사회로 변모하고 있다고 진단한 바 있다. 산업화 초기가 절대적 빈곤시대였다면 최근에는 상대적 불평등과 박탈감이 심화하고 있다는 의미에서였다. 하지만 4년 가까이 세월이 흐른 오늘날, 그때의 생각을 바꾸고 싶다. 한국사회는 헝그리 시대에서 앵그리 시대로 이동 중이 아니라 빈곤과 분노가 결합하는, 혹은 빈곤 때문에 분노하는 시대가 되었기 때문이다.

원인은 단연 양극화이다. 물론 이는 작금의 세계화 추세 속에서 벌어지는 지구적 현상이다. 옥스퍼드 영어사전이 선정한 ‘올해의 단어’가 ‘쥐어 짜인 중산층(squeezed middle)’일 정도다. 얼마 전에 발표된 통계청 2011년 사회조사 결과에 의하면 우리나라에서 스스로를 중산층으로 생각하는 가구주의 비율은 52.8%로 1988년 시작된 관련통계 생산 이후 최저치였다. 국민의 절반 가까이가 자신을 하류층으로 인식하고 있는 가운데 자녀의 사회적 지위가 본인보다 높아질 것으로 기대하는 사람의 비율도 현저히 떨어졌다.

당장 살기가 힘든 데다 미래에도 희망이 없다면 세상에 대한 분노는 인지상정이다. 그리고 분노는 ‘약자(弱者)들의 무기’인 연대와 단결로 이어지는 것이 역사의 법칙이다. 게다가 지식·정보혁명 시대를 살아가는 요즘의 사회적 약자들은 미증유의 ‘영리한 군중’이다. 시사주간지 타임이 ‘올해의 인물’로 ‘항의자(the protester)’를 선정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지난가을 시민운동세력의 서울시장 배출이나 이른바 ‘안철수 현상’의 분출은 빈곤의 보편화에 따른 분노 네트워크의 위력을 실감나게 보여준다.

빈곤 보편화 따른 분노 네트워크

세계 9번째 무역 1조 달러 국가라는 자부심은 20%대를 넘어선 청년 체감실업률 앞에서 한가한 남의 나라 이야기로 들리기 십상이다. 한미 자유무역협정(FTA)의 논리적 타당성 또한 저임금 비정규직 노동자가 전체 근로자의 절반 이상인 현실 앞에서는 귀에 잘 들리지 않는다. 지금처럼 무서운 양극화 추세가 대다수 사회구성원들을 점점 더 낙오자, 희생자, 피해자로 내몰아 간다면 승자를 쳐다보는 시각과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은 더욱더 증오로 가득 찰 수밖에 없다.

이런 점에서 삼성 현대 SK LG 등 대표적 재벌그룹들이 올해 들어 연말성금 기부 액수를 크게 늘리고, 특히 직접 몸으로 뛰는 이웃사랑 캠페인을 대폭 강화하고 있는 일은 눈여겨볼 대목이다. 최근 들어 대기업 총수들의 공익재단 설립이나 사회공헌 행위가 부쩍 활발해진 것도 주목할 만한 변화다. 그러나 이런 방식이 신빈곤 시대에 대처하는 근원적 요법은 아니다. 분식회계와 편법상속, 회삿돈 횡령과 비자금 조성, 가족경영 및 족벌체제, 중소기업의 희생과 불공정한 원청 하청 관계와 같은 전근대적 관행과 비시장적 악습부터 청산해야 본말이 맞다. 하지만 재벌기업들의 일탈과 비리, 그리고 탐욕은 오늘 아침까지도 여전히 생생한 뉴스거리다.

스스로 오점과 약점이 너무 많은 우리나라 재벌들은 간헐적 선심과 홍보성 선행을 노블레스 오블리주(사회지도층의 도덕적 책무)의 전부로 착각하는지 모른다. 또한 무언가 빌미를 제공하는 원죄(原罪)가 있어서 그런지 아이로니컬하게도 그들에게는 반자본주의 진보·좌파진영과 공존하는 경향이 있다. 진보 단체에 부지런히 ‘협찬’하고 좌파 언론에 열심히 ‘보험’을 드는 식의 ‘적과의 동침’은 말하자면 재벌 나름의 생존전략인 셈이다. 우리나라의 진보·좌파세력에 재벌이란 일종의 호구(虎口)이자 숙주(宿主)다.

좌파의 호구로는 미래 없다

이런 비원칙적 비정상적 비본질적 접근으로는 문제의 핵심이 해소될 수 없다. 한 걸음 더 나아가 우리나라 경제체제와 사회구조의 지속가능성은 물론이고 재벌 자신의 미래조차 담보되기 어렵다. 따라서 보다 근원적인 처방은 양극화의 원인 제공자이자 최대 수혜자인 대기업들이 시장경제의 제도적 성숙과 자본주의의 도덕적 진화 과정을 진정으로 선도(先導)하는 일이다. 이명박 정부에 대한 싫고 좋음과 무관하게 ‘공정사회’나 ‘동반성장’ 그 자체는 우리 시대의 지상명령이다.

금년에는 빈곤의 만성화에 의한 분노의 시민연대가 주로 정치권을 겨냥하였다. 하지만 총선과 대선이 치러지는 내년의 경우 ‘똑똑한’ 민심은 우리나라 지배 카르텔의 정점인 재벌 경제체제를 정조준할 공산이 높다. 재벌이 끝내 정신을 못 차린다면 보수·우파진영 역시 더는 그들의 우군(友軍)이 아닐 것이다.

전상인 객원논설위원·서울대 환경대학원 교수 sangin@snu.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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