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에서/이철희]‘스위스 보이’의 추억

  • 동아일보
  • 입력 2011년 12월 30일 03시 00분


이철희 정치부 차장
이철희 정치부 차장
그가 소환 통보를 받고 귀국한 것은 스물아홉 살 때였다. 아버지의 뒤를 이을 후계자였던 형이 교통사고로 사망하면서 그 자리를 대신해야 했기 때문이다. 조용하고 내성적이던 청년은 곧바로 사관학교로 보내졌고 4년 만에 대령으로 초고속 승진했다. 아버지의 보좌역으로 민원업무를 담당하며 컴퓨터협회장도 맡았다.

이어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면서 서른다섯에 아버지 자리를 물려받았다. 그를 위해 40세였던 나이제한도 34세로 낮춰졌다. 영국에서 공부한 안과의사 출신에 영국 국적의 부인까지 둔 신장 189cm의 호리호리한 ‘모더니스트’ 청년에게 많은 이들은 기대를 걸었다. 29년이나 군림하던 아버지와는 다르리라고.

바샤르 알 아사드 시리아 대통령의 얘기다. 2000년 권좌에 오를 때까지의…. 그런 그가 올해 민주화 시위대 5000명 이상을 사살했다고 비난받는 주인공이 됐다. 그도 초기엔 개혁과 변화를 약속했고 일부 실행도 했다. 하지만 ‘다마스쿠스의 봄’은 짧았다. 그는 이내 “정치개혁보다 경제개혁 먼저”라며 자신을 둘러싼 군부와 비밀경찰 뒤편으로 숨어버렸다.

북한의 ‘위대한 영도자’에 오른 스물아홉의 청년 김정은. 그는 1990년대 후반 스위스 베른에서 학교를 다녔다. 북한엔 이른바 ‘고난의 행군’ 시절이었다. 그는 굶주리는 조국의 현실에서 벗어나 풍요로운 유럽의 소도시에 살면서 농구와 컴퓨터게임에 열광했다. 그러면서도 “집에 있을 땐 북한 노래만 들었다”고 단짝이었다던 옛 친구는 전한다.

그 시절이 김정은에겐 악몽이었을지 모른다. 친구들이 자기 이름 앞에 ‘둔하다’ ‘어둡다’는 뜻의 형용사(dim)를 붙여 부르는 것을 들으면서 분노하기도 했을 것이다. 스포츠와 게임은 사춘기 소년에게 닥친 정체성 혼란을 이기기 위한 도피처였는지 모른다. 그럼에도 스위스 생활은 성장기 소년에게 분명한 흔적을 남겼으리라.

김정은은 비록 3남이지만 어려서부터 아버지의 각별한 관심을 받아온 유력한 후계자 후보였다. 2001년 배다른 형 김정남이 일본에 밀입국하려다 들통 나 세계 언론의 톱뉴스를 장식하면서부터 그의 후계수업은 이미 시작됐을지 모른다. 친형 김정철을 두고 아버지가 “쟤는 안돼. 여자애 같아서…”라고 했다는 얘기가 맞다면 말이다.

김정은은 귀국 후 김일성군사종합대에 다닌 것으로 알려졌다. 선군(先軍)국가에서 군 경력은 후계자의 필수 코스다. 외국 경험이 없는 아버지 김정일은 ‘외국 물’ 먹은 사람들을 신뢰하지 않았다고 한다. 군사교육엔 아들의 머릿속에 스민 ‘자본주의 황색바람’을 씻어내려는 목적도 있었을 것이다. 이런 세뇌 교육이 그의 소년기를 말끔히 지워냈을까.

최근 김정은이 다녔던 스위스 학교의 교장은 “스위스에서 받은 민주주의 교육이 북한 통치에 좋은 영향을 미치길 바란다”고 밝혔다. 가혹하기론 어느 나라에 모자라지 않을 북한 체제에 민주주의를 주문하는 것은 가당치 않은 일이다. 더욱이 나이 어린 계승자로선 권력엘리트의 가혹한 인민 통제기술 없이는 자리보전이 어려울지 모르는 상황이다.

하지만 역설적으로 북한에 변화를 가져올 수 있는 사람은 김정은뿐이라는 점도 사실이다. 철저한 유일영도체제에서 최종 결정은 영도자의 몫이기 때문이다. 김정은이 소년 시절의 기억을 조금이라도 끄집어내 변화의 바람을 불러오길 바라는 것은 그저 허망한 기대만은 아닐 것이다. 그런 변화가 시리아에서처럼 광포한 반동(反動)으로 끝나지 않기를 소망한다.

이철희 정치부 차장 klimt@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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