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까지 살아있는 것도 축복… 자연에 감사하며 살고 싶어…
기적을 기적으로 알아볼수있게 예민한 촉수가 더 민감해졌으면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 없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했다.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해야지. 그리고 나한테 주어진 길을 걸어가야겠다. 오늘 밤에도 별이 바람에 스치운다.》
윤동주의 서시(序詩). 버킷 리스트란 제목을 듣자마자 떠오른 시다. 왜일까? 언감생심.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 없기’는 꿈도 꾸지 못하면서 왜 감히 이 시가 떠올랐을까? 그 저변에는 “뭘 더 바라?”가 있었다. 태어난 게 축복인데, 지금까지 살아 있는 게 축복인데, 품 안의 고양이가 축복이고 싸늘한 이 아침 공기가 축복인데, 더 이상 뭘 바라? 무슨 리스트가 더 필요해? 이런 정서가 있었다.
한 발 더 나아가 보면 “뻔뻔스럽게 뭘 더 바라?”가 있었다. 태어나서 지금까지 살면서 그렇게 많은 해악에 관여해 놓고. 그렇게 많은 공해를 만드는 데 기여해 놓고. 내가 그동안 먹어 온, 먹고 있는, 그 많은 동물들의 무고한 죽음에 기대어 살아 왔으면서. 결국 우리 인간들이 야기한 광우병이니 조류독감이니 구제역이니 하는 질병에 분명 내가 감당해야 할 책임이 있으면서. 그러고는 ‘도살처분’이란 양심 부재의 단어로 그 많은 생명을 산 채로 파묻은 주역이면서.
그러니 나에게는 버킷 리스트가 없다. 혹시 있다면 시인의 이 한마디.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해야지.’ 이 추운 날, 가녀린 가지마다 바람 맞고 있는 그 나무들. 그들을 사랑해야겠다. 지난여름 태풍에 나보다 먼저 간 나이 어린 가로수들에 미안해하면서. 내가 바로 자신들의 동족을 끊임없이 잡아먹는 괴물인지도 모르고, 순진무구하게 오늘도 나를 위해 강변의 공연을 펼쳐주는 새들에게 고마워하면서. 그렇게 ‘나한테 주어진 길을 걸어가야겠다.’
‘나한테 주어진 길’은 나에게 속도 조절을 요구한다. 잔디가 자라는 속도, 정 많은 나무가 가을바람에 나뭇잎을 하나씩 하나씩 내려놓는 속도, 그 똑같은 나무가 다부진 가지마다 이미 또 다른 봄을 준비하고 있는 속도, 아침마다 수영장 앞에서 만나 서로 눈인사를 주고받는 하얀 강아지가 커가는 속도, 내 무릎 사이에서 잠을 자고 있는 고양이가 늙어가는 속도, 부지런한 담쟁이가 기어이 담을 넘어가는 속도, 바람이 부는 속도, 그 바람에 강물이 반응하는 속도, 별이 떠오르는 속도, 달이 차고 기우는 속도. 그 속도에 내가 온전히 편입될 것을 요구한다. 자동차 달리는 속도가 아니라 잔디 자라는 속도로 살라고. 내가 숨 쉬는 속도와 바닷가 파도치는 속도가 한 호흡이 될 수 있게 살라고.
‘해질 녘 서편 하늘을 물들이는 장엄한 노을 앞에 섰거나, 한밤중 아득한 천공에서 무수히 쏟아져 내리는 별무리의 합창을 들을 때, 혹은 동틀 녘 세상 끝까지 퍼져나가는 황금빛 햇살의 광휘를 온몸에 맞으면서, 어느 누가 감히 예술을 논하겠는가. 봄날 작은 꽃망울을 터뜨리는 햇가지들을 가만히 들여다보자. 길고 짧고 굵고 가는, 물기 오른 여린 가지들이 이루는 조화와 오만 가지 빛깔, 그것은 기적이다. 가을 새벽 거미줄에 붙들린 조그만 이슬 알갱이에 다가서 보자. 그 깜찍한 비례며 앙증맞은 짜임새도 경이롭지만 알알이 비치는 방울 속마다 제각기 살뜰한 우주가 숨어 있다.’
‘죽기 전에 이것만은’이 버킷 리스트라면 나의 버킷 리스트에는, 오주석이 ‘옛 그림 읽기의 즐거움2’에 썼던 이 글이 들어갈 것이다. 순간순간 내 눈 앞에 펼쳐지는 기적을 기적으로 알아볼 수 있는 촉수. 그 예민한 촉수가 죽는 날까지 계속되길. 아니 죽는 날까지 더 민감해지길. 그리고 산뜻한 낙화.(산뜻한 낙화는 법정 스님의 책 ‘맑고 향기롭게’에 나온 한 구절을 인용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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